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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인 앤 글로리 Dolor y gloria, 페드로 알모도바르(2019)
팬데믹은 예술인들로 하여금 내면을 파고들게 만들었으므로 영화계에서도 특히 자전적 영화와 영화에 관한 영화가 빗발치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겠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Dolor y gloria는 2019년에 개봉했으므로 해당 날짜보다는 앞섰으나 내가 영화를 본 건 근래의 일이다. 그러니 그가 앞서서 촬영한 영화를 보고 이후의 영화들을 연상한다고 해도 질책받을 일은 아니리라. 이를테면, "내 얘기 당신 영화에 넣지 마"라고 말하는 인물과 그의 말까지도 영화에 넣어버린 것은 스필버그의 파벨만스와 똑같다. 영화 감독들이란. 또 어린 시절에 만난 한참 연상의 동성이 베푸는 친절에 동성애 성향을 띄게 된 것은 샬롯 웰스의 애프터썬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이 부분은 특히 알모도바르의 전작도 연상시키는데, 나쁜 교육에서 앙헬이 흰 팬티를 벗는 장면이 상당히 페테쉬즘적으로 연출되는가 하면, 본 영화에서도 그렇다. 어쩌면 그가 느낀 '최초의 욕망'이 그의 영화에 이미 구현되었고, 이번 영화는 전작의 그것이 경험이었음을 고백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처음 빨래하며 노래 부르는 페넬로페 크루즈와 여자들부터, 카타콤과 같은 동굴로 된 집의 울퉁불퉁한 흰 벽에 드는 햇빛, 알록달록 빛나는 타일을 작업하는 석공과 그를 가르치는 소년, 화려한 색상의 벽과 미술품이 걸린 감독의 방, 붉은 배경을 두고 관객을 마주보며 독백하는 연기자. 영화의 모든 장면이 좋지만 특히 엔딩 샷은 감탄을 자아낸다. 모든 것을 소재로 치환하여 작품의 일부로 만들어버리는 예술가란 참 못말리는 존재다만, 그것이야말로 그가 기억하는 방식이고 위안하며 초월하는 방식이다.
죽을 때가 되면 주마등이 찾아오듯, 제목이 그렇게 지어진 것처럼, 고통은 인생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그런데 그 속에서 빛을 보기도 하는 것이다. 고통마저도 삶의 일부이며 또 나의 일부이다. 어쩌면 미워하는 것이 나를 살게 하기도 한다. 삶에 대한 회고와 고통에 대한 포용은 또 당연하게도 앞에서 나열한 자전적 영화들처럼 나를 키운 사람들에 대한 경애로 이어지기도 한다.
"사랑만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구할 수는 없다"라는 문장이 결정적인 한 방이고 또 누구에게나 굉장히 인상 깊을 만한 대목이겠지만, 내게 남은 것 또 한 가지는 연극으로 올린 시기의 경험이 그를 '어떤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 키웠고 또 "어떤 색채로 표현할지 알"게 했다는 점이다. 그 고백은 극증국에서 '배우'의 입을 빌려 발화되는데, 비주얼리스트다운 강렬한 빨강 앞에서 연기된다.
순간으로 영원을 사는 사람이 있다...는 말마따나 하나의 계기가 평생의 스타일을 만들기도 한다. 창작자는 결국 한 가지의 주제를 영원히 변주할 뿐이다. 지루한 소리지만 또 이 영화에서 전작 찾기를 한 번 더 하자. 살바도르가 석공 소년의 나신을 보고 어지러워 쓰러졌을 때 그는 앞으로 이렇게 살게 되리라는 걸 알았을 것이다. 나쁜 교육에서 머리가 깨진 이그나시오는 그랬다. "그때 나는 예감했다. 내 평생은 쪼개지고 쪼개지는 연속일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