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퇴근. 그날 오전부터 낮까지는 사진과 방송 촬영이 있었고 과장님과 나만 인터뷰를 따였다. 사무실의 젊은 인원들 중 우리가 제일 용모가 뛰어났겠거니 한다. 뛰어났다는 건 실제가 그랬다는 게 아니라 제일 신경 썼다는 뜻이다. 무슨 일에든 난 존나 신경을 쓴다. 존나 무슨 일에든 신경을 기울인다. 뇌의 100%를 사용하려고 한다.
과장님은 솔직히 매력적이다. 그는 화장을 하고 립스틱을 바르고 셔츠를 입고 구두를 신는다. 그가 유부남이 아니었다면 짝사랑을 시작해봤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가 유부남이기 때문에 이미 짝사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나한테 친절했던 모든 사람과 자고 싶고 살고 싶다.
퇴근 후에 대학 시절 청주에서 종종 보았던 친구를 만났고 그날 밤 숙소에서는 지루한 영화를 봤다. 전도연이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무뢰한을 골랐다. 최근의 나는 좋은 점을 봐주려 하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이 영화가 나한테는 꽤 괜찮았을지언정 그녀는 이 영화를 참지 못한다. 잠들어서 중간에 깼는데, 그녀는 내 옆이 아니라 소파에 누워 있었고, 내 악몽과 좋지 못한 잠버릇이 그 밤을 망쳤다. 여기까지 올라온 사람한테 너무 미안해서 다음날엔 모든 비용을 내가 냈다. 웃기는 해프닝으로 끝나서 다행이다. 용서받을 수 있어서.
둔산동의 한밭수목원과 시립미술관으로 이어지는 아파트 단지 길목은 너무나 아름답다. 한국의 어느 도시가 그렇게 아름다운 수목으로 조경되어 있을지 모르겠다. 코고나다의 콜럼버스나 뉴욕 라이브러리에서 같은 영화에서 본 풍경 같다. 차가 빼곡한 도로와 볼품없는 아파트 단지를 구획하는 나무들. 잘 자란 나무가 도심의 경계를 채우고 있음만으로 눈으로 보기에 도시는 훨씬 나아질 수 있다.
앤디 워홀은 궁금하지 않았고 백남준의 텔레비전 같은 조형물과 열린 수장고를 본다. 예술을 팔아주진 못하고 개방된 예술만 찌끄린다.
예당에서 키리에. "내 몸은 귀신들린 집이고 나는 그 안에서 길을 잃었다(재키 저메인)". 놀라운 영성체험과 젊은 여성 혹은 퀴어가 이 극을 썼다는 감각. 극이 주는 강렬함도 있지만 이젠 잘 쓴 책을 덮고 그러듯이 연극이 끝나도 생각한다. 내가 저 세계에 없다는 것? 추방된다는 것? 내가 저걸 쓰지 못했다는 것? 내가 저 무대에 없다는 것? 그런 씨발같이 자아 비대한 생각?
"트위터 스페이스에서 연극을 하는데요" 음...
어쨌든 간에 배우란 그리 대단한 직업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연기를 하고 있다.
우리는 외로움에 대해 토로한다. 우동집에서 유부우동과 새우초밥을 먹으면서 솔직히 홍상수 영화의 김민희처럼 얘기한다. 정말 마시지 않고도 취한 것처럼 말하시네요 그런 이야기를 듣게 된다. 우리 주변의 모두가 조용해졌다. 우리만 떠들고 있다. 일상 속에 이렇게 방백이 있고 내 역할은 ()
입을 다물자면 끝없이도 과묵할 수 있는데 그날은 말이 많았다. 헤어지고 싶지 않고 계속 끄집어내고 싶어서 카페가 문을 닫을 때까지 강변에 앉아 떠들었다. 카페가 문을 닫아선 내 집까지 걸었다.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집 앞 공터에 앉아 울었다. 지난 주에 운 얘기에 대해서 또 했다. 어느 날은 남들의 이야기가 듣기 싫다. 어느 날은 남들의 이야기가 무척 듣고 싶다. 그들이나 나나 다름없을 때마다. 어제가 후자 같은 날이었고 또 나는 나 같은 인간들만 궁금해하는구나. 얘기가 통하는 상대라는 건 결국 그런걸까? 이제 나는 가난하거나 성적으로 결핍되거나 구직중이거나 신경처리장애가 있거나 일을 쉬지 않았거나 피곤한 그야말로 나같은 사람들과만 얘기할 수 있는 건가? 언제는 오픈 마인드만 있으면 누구랑이나 친구할 수 있다며?
많은 고백을 했는데 그중에 뭐가 진심이었을지 모르겠다. 가끔은 그렇게 흘러가서 그렇게 되어버린다. 내가 그렇게 노를 젓기도 했지만 바람이 그 방향으로 불기도 했다. 내가 이해받는다는 게 이상하다. 우리가 함께 있는데도 각자 외로워한다는 게 이상하다. 그녀를 내 방에 재우지 못하고 혼자 보낸 게 마음에 걸린다.
남들이 무심하다는 이유로 나는 무심해진다.
한 달여 만에 딸을 쳤는데 성감이 너무 크게 다가왔다. 두려워져서 한 일 분 찌끄리다 말았다. 발기부전의 나날이 지속된다.
병력을 숨기려고 한 게 아니라 일부러 고백하지 않은 지가 꽤 됐는데, 실제로 그때의 나는 내가 아니게 됐기 때문이다. 오늘은 레이브 파티에 갈 수도 있다. 오늘은 운전 면허를 딸 수도 있다. 광과민이라고 말한다. 면허 딸 때를 놓쳤다고 말한다. "그럼 어떻게 되는데?" "돈 달라고 말 안 했잖아" 다시 생각해보니, 난 멀쩡해도 하지 않았을 것 같다. 발작을 할 때 나는 그걸 잘한다고 말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실신 지연을 겪겠지만 솔직히 어느날부터는 당혹스럽지도 고통스럽지도 않다. 아프다는 감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너무 멀쩡한 정신으로 자기 처신을 할 수 있다. 빨리 끝내고 싶기도 하고 한편으론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도스토예프스키처럼, 그처럼 영성적인 임사체험을 하지는 못했는데, 길어지면 길어지는대로 혼자 있었고, 발견되길 바랐다. 발견되고 싶었다. 지금 그걸 바란다. 너무 오랜 시간을 시간낭비하며 보냈음에도, 차라리 유예할 수 있었고 용서받을 수 있었던 그 때를 원한다. 나는 재활 혹은 재사회화에 실패했다. 잘못된 때에 잘못된 곳에서 잘못된 몸으로 잘된 척을 해야 한다. 강박적인 그 짓들이 나를 제자리에 돌려줄 것이라고 믿으면서. 발견되길 바라면서, 그때 그 짓의 이름이 지랄이고 지랄의 쓰임새를 생각하면 절묘하다. 내가 어디까지 나아져야 하는데? 나아지겠다는 일념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지?
마법 같은 일들은 종종 일어나지만 비참함을 깨끗이 없애주는 덴 마법보단
잘 해보려고 한 선택들이 나를 족쇄처럼 옭아맨다(지팔지꼰). 사회는 개인의 총합이 아니고 전체성은 개별성의 포괄이 아니다. 멋진 날들이 멋진 인생을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멋진 날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