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서독 외교관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서 그는 젊은 덴마크 남성과 대화를 하게 되었다. 그 청년은 유난히 친절했으며, 상당히 취한 상태였다. 클래식 음악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가 함께 술을 마시러 가자고 청했지만, 올레크는 집에 가야 한다면서 정중히 거절했다.
그 청년은 덴마크 정보국의 공작원이었고, 그날의 대화는 올레크를 동성애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덴마크 당국은 동성애 포르노에 올레크가 관심을 보인 것에 착안해, 첩보 기법 중 가장 유서 깊고 가장 지저분하고 가장 효과적인 미인계를 준비했다.
〈나는 약 2분 만에 승낙했다.〉 고르디옙스키와 스푸너는 조용히 서로를 가늠해 보았다. 〈그는 내가 미리 꼼꼼한 브리핑을 듣고 예상했던 모습 그대로였다.〉 스푸너는 이렇게 말했다. 〈젊고 활기 있고 유능하고 절제되고 일에 잘 집중하는 사람.〉 이 설명은 스푸너 자신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성인이 된 뒤로 줄곧 첩보 세계에 깊이 발을 담갔고, 첩보 활동을 역사라는 프리즘으로 바라보았으며, 비유적으로도 실제로도 같은 언어를 사용했다. 〈나는 한 번도 그를 의심한 적이 없다. 전혀.〉 스푸너는 이렇게 말했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무엇을 믿고 무엇을 믿지 말아야 하는지 그냥 알게 된다. 스스로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올레크는 전적으로 믿을 만하고 정직한 사람이었으며, 올바른 동기가 그를 움직였다.〉 고르디옙스키는 스푸너가 〈일급 정보 요원이지만 정말로 상냥하고, 감정과 감수성이 충만하고, 개인적으로도 윤리적인 원칙 면에서도 정직한 사람〉임을 곧바로 알아보았다. 나중에 그는 스푸너를 가리켜 〈내가 만난 최고의 관리자〉였다고 말했다.
라이언 작전을 시작하면서 안드로포프는 첩보의 첫 번째 규칙을 어겼다. 자신이 이미 믿고 있는 사실에 대한 확인을 결코 요구하지 않는다는 규칙. 히틀러는 디데이에 적군이 칼레로 상륙할 것이라고 확신했으므로, 그가 파견한 스파이들도 (연합국 측이 심은 이중 첩자들의 도움으로) 같은 내용을 그에게 보고했다. 그것으로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성공이 확보된 셈이었다. 토니 블레어와 조지 W. 부시는 사담 후세인이 대량 살상 무기를 갖고 있다고 믿었으므로, 그 두 나라의 정보기관들도 당연히 그런 결론을 내렸다. 현학적이고 독재적인 유리 안드로포프는 핵 공격이 임박했다는 증거를 KGB 부하들이 찾아낼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으므로, 부하들은 그런 증거를 찾아냈다.
물론 서방에서는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헌혈을 한다. 그들에게 지급되는 것은 쿠키 한 개뿐이며, 때로는 주스 한 잔이 곁들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크렘린은 자본주의가 서구인들의 생활 구석구석에 스며들었을 테니 〈혈액은행〉이 정말로 혈액을 사고파는 은행일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그런 증거를 찾아냈다. 모든 인간의 행동은, 아주 샅샅이 훑듯이 들여다보면 점점 의심스러워 보일 수 있다.
「당신은 KGB 레지덴투라의 추가 멤버와 같아요.」 고르디옙스키는 스푸너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베터니를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는 북아일랜드의 경험에서 결코 회복하지 못했다.〉 그는 사투리를 쓰고, 자신의 것이 아닌 이미지를 연기하는 사람이었다. 가족도, 친구도, 사랑도, 확고한 신념도 없는 그는 대의를 찾아 헤매면서 자신에게 전혀 맞지 않는 일을 계속했다. 〈그는 진짜가 아니었다.〉 매닝엄불러는 이렇게 말했다. 첩보 세계의 독특한 스트레스와 비밀주의가 그를 현실에서 더욱더 먼 곳으로 밀어 버렸을 수도 있었다. 베터니가 다른 일을 택했다면 평탄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비밀 그 자체와 첩보 세계의 낭만에 흥분할 줄 아는 사람〉
〈고르디옙스키의 보고서는 (……) 다른 정보와 달리 소련 지도자들이 서구적인 현상들에, 그리고 그녀 자신에게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그녀에게 전해 주었다.〉 그는 크렘린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문을 열어 주었고, 대처는 감사의 마음을 안고 홀린 듯이 그 창문 너머를 들여다보았다. 〈대처 총리가 고르디옙스키에게 한 것만큼, 영국 총리가 영국 첩자에게 개인적인 관심을 쏟은 적은 없는 것 같다.〉
〈철의 여인〉(소련의 군 신문이 대처를 모욕할 생각으로 만들어 낸 별명이지만 대처 본인은 아주 좋아했다)
〈가슴이 두툼한 곰 같은 남자, 활기가 가득했다. (……) 드라마 같은 스파이 게임을 사랑했으며, 스파이로서 솜씨가 좋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이 비밀의 세계가 그에게는 집 같아서, 그는 스스로 설정한 무대에서 스스로 대본을 쓴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처럼 매 순간을 즐겼다〉
1세기 전 카를 마르크스도 자기 자식들이 영국 생활에 금방 적응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아이들은 그 소중한 셰익스피어의 나라를 떠난다는 생각만으로도 경악한다. 골수까지 영국인이 되었다.〉마르크스 부인의 말이다.
「나는 KGB 요원 집안에서 자랐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지. 내가 뭔가 했다는 사실을 언젠가 당신이 알게 될지도 모르잖아.」
페레스트로이카(개조)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 사실이기도 했다. 고르바초프에게 제출되는 KGB의 일일 브리핑 자료는 〈감사의 뜻이나 만족감을 나타내는 밑줄이 군데군데 그어진 상태로〉 되돌아왔다. 고르바초프가 자료를 상세히 읽고 있다는 뜻이었다. 〈양쪽 모두 우리한테 브리핑을 받고 있었다.〉 MI6의 분석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새로운 일을 하고 있었다. 정보를 왜곡하지 않고, 관계를 이어 가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기 위해 정보를 이용하려 진심으로 애쓰는 일. 몇 명 되지 않는 우리들이 역사의 첨단에서 놀라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KGB의 방첩 전문가인 니키텐코는 노란 눈으로 흔들림 없이 고르디옙스키를 바라보았다. 「흠. 제프리 하우에 대한 아주 좋은 보고서야.」 니키텐코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이었다. 「외무부 문서 같단 말이지.」
에임스는 CIA에서 낡았지만 친숙한 가구와 같았다.
〈일단 불가능한 것들을 걸러 내고 나면, 그 뒤에 남은 것이 무엇이든 아무리 거짓말 같은 것이라 해도 반드시 진실일 수밖에 없다〉
CIA는 올레크 고르디옙스키에게 임의로 티클이라는 암호명을 부여했다. 무해하고 사소한 국제적 경쟁에 어울리는 중립적인 이름이었다
막심 파르시코프는 친구의 달라진 모습 하나를 보고 확실히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숱이 적고 희끗희끗하던 머리카락이 갑자기 노란색이 섞인 붉은색으로 변했다.〉 소련식으로 희끗희끗하던 고르디옙스키의 머리카락이 하루아침에 이국적인 펑크 머리가 되었다. 동료들은 몰래 키득거렸다. 「젊은 애인이라도 생겼나? 아니면, 설마, KGB 런던 지부장 자리에 앉기 5분 전에 올레크가 게이가 된 거야?」 파르시코프가 어쩌다 머리가 그렇게 되었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어보자, 올레크는 조금 민망해하면서 아내의 염색약을 샴푸로 착각해서 잘못 썼다고 설명했다. 고르디옙스키의 새 황토색 머리카락과 레일라의 어두운색 머리카락은 서로 아주 달랐으므로 전혀 설득력이 없는 설명이었다. 〈《샴푸를 착각한 실수》가 일상이 되자 우리는 더 이상 그에게 묻지 않았다.〉 파르시코프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누구나 각자 이상해질 권리가 있다.〉
그들은 최종 결정을 고르디옙스키 본인에게 맡기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에게 모스크바로 꼭 돌아가야 한다고 강요하지도 않고, 이만 수건을 던지고 게임을 포기하라고 권하지도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건 책임 회피였다.〉 MI6의 한 요원은 나중에 이렇게 주장했다. 〈그의 목숨이 걸렸으니 우리가 그를 보호했어야 했다.〉
〈만약 그가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면 누구도 그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도 그런 시도를 하지 않았을 테고. 우리의 진심을 그가 깨달았던 것 같다. 나는 불편부당해지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날 저녁 고르디옙스키는 레일라에게 〈최고위급 회의〉를 위해 모스크바로 갔다가 며칠 뒤 런던으로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그는 불안하고 열성적인 표정이었다. 〈레지덴트로 확실히 확인받을 것이라는 말에 나도 들떴다.〉 그가 손톱을 하도 씹어 대서 속살이 드러난 것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다음 날도 소용돌이치는 내면과 연기하듯 꾸며 낸 겉모습이 섞여 똑같이 흘러갔다.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서로를 속이는 이상한 연극 속에서 고르디옙스키와 KGB는 모두 서로 보조를 맞추는 척하면서 상대가 발을 헛디디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절대 자백하지 마.」
〈우리가 최선을 다해 계획을 세웠다고 생각했다. 이제 모스크바 지부 사람들이 나서 줄 차례였다.〉 프라이스는 걱정만 하지 않았다. 그녀가 특별히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 사라졌지만, 그를 찾아내서 구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프라이스는 초여름 소련-핀란드 국경의 모기떼가 사납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모기 쫓는 약을 샀다.
〈오래된 초코바들이 우리 외투 주머니, 가방, 자동차 글러브 박스에 대량으로 쌓였다.〉 애스콧은 평생 킷캣 초코바라면 질색하게 되었다.
레일라는 그의 뺨에 재빨리 입을 맞추고 기분 좋게 손을 흔들었다. 「조금만 더 다정하게 해주지.」 그는 반쯤은 혼잣말로 이렇게 말했다. 곧 가족을 버릴 남자의 불평이었다. 이렇게 헤어지면 잘해야 무기한 이별이 될 것이고, 최악의 상황에는 그가 체포되어 불명예 속에 처형될 수도 있었다. 레일라는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 딸들의 뒤를 쫓아 북적거리는 상점 안으로 사라지면서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심장이 조금 부서졌다.
첩자와 담당관의 관계에는 직업적인 측면과 감정이 독특하게 섞여 있다. 뛰어난 담당관은 심리적 안정, 경제적 지원, 격려, 희망, 독특한 애정뿐만 아니라 보호받을 수 있다는 안정감도 제공해 준다. 첩자를 포섭해서 관리하는 데에는 그를 보살펴야 한다는 의무가 따른다. 첩자의 안전이 언제나 가장 우선이며, 위험이 보상을 능가하게 두지 않겠다는 암묵적인 약속이다. 모든 담당관은 이 약속의 무게를 느낀다.
〈핀란드화〉라는 말은 작은 나라가 자기보다 훨씬 강대한 이웃 나라 앞에서 이론적으로는 주권을 유지하면서도 사실은 협박에 무릎을 꿇어 굴복한 상태를 뜻하게 되었다.
〈서쪽을 모욕하지 않으면서 동쪽에 절하는 기술〉
그는 좋은 사람으로 여겨지기를 원했다. 그동안 자신이 전적으로 기만했던 KGB가 자신을 존중해 주기를 바랐다.
〈우리는 이 길에 마음을 바쳤다. 길은 하나뿐이니 계속 이 길로 나아가야 한다.〉
그들은 모든 독재 국가에서 기회주의자들이 하는 행동을 했다. 문제가 저절로 사라지기만 바라면서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두려움과 흥분은 식욕과 정신에 기묘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고르디옙스키는 덤불 속에 계속 숨어 있었어야 했다. 재킷을 머리 위로 뒤집어쓰고 모기들이 마구 날뛰게 두었어야 했다. 거기서 기다렸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다른 행동을 했다. 나중에 돌이켜 보니 거의 미친 짓이었다. 그는 비보르크로 들어가 술을 한잔하기로 했다.
레이철에게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비밀 승객이 트렁크 안에서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냄새였다. 땀, 싸구려 비누, 담배, 맥주 냄새가 뒤섞여 자동차 뒤쪽에서부터 퍼지고 있었다. 딱히 불쾌한 냄새는 아니었지만, 아주 뚜렷하고 강렬했다. 〈소련의 냄새였다. 평범한 영국 자동차 안에서는 맡을 수 없는 냄새.〉 냄새 맡는 개들이라면 이 자동차 뒤쪽에서 앞좌석 승객들과는 확연히 다른 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차릴 것이다.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에서 클래식 음악이 갑자기 최고 볼륨으로 터져 나왔다. 닥터 훅의 감상적인 팝송이 아니라, 고르디옙스키가 잘 아는 풍부한 오케스트라 소리였다. 아서와 레이철은 그가 자유의 땅에 들어섰음을 아직 말로 전해 줄 수 없었으나, 소리로 전할 수는 있었다. 핀란드 작곡가 잔 시벨리우스가 조국을 찬양하기 위해 지은 교향시의 유명한 첫 선율로. 「핀란디아」였다.
개가 차를 한 바퀴 도는 동안 캐럴라인 애스콧은 냉전 이전에도 다른 시대에도 배치된 적이 없는 무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는 스파이가 숨어 있는 트렁크 위에 플로렌스를 내려놓고 기저귀를 갈기 시작했다. 마침 아기가 시간을 딱 맞춰 기저귀를 푸짐하게 채워 준 참이었다. 캐럴라인은 냄새 나는 더러운 기저귀를 호기심 많은 셰퍼드 옆에 떨어뜨렸다. 〈개는 당연히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이렇게 후각을 교란하는 것은 원래 계획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기저귀를 이용하는 것은 즉석에서 생각해 낸 방법인데 효과가 아주 좋았다.
고르디옙스키는 그녀의 양손을 잡고 들어 올려 입을 맞췄다. 감사와 해방을 뜻하는 확실한 러시아식 몸짓이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나란히 선 캐럴라인 애스콧과 레이철 지를 향해 비틀비틀 걸어갔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그들의 손에도 차례로 입을 맞췄다. 〈처음에 덤불 속에서 나온 사람은 커다란 황소 같았는데, 갑자기 이렇게 정중하고 섬세한 몸짓이라니.〉 그는 어깨에 여전히 우주 담요를 걸친 채였다. 〈방금 마라톤을 마친 선수 같았다.〉
고르디옙스키는 프라이스가 정성 들여 싸온 샌드위치와 과일 주스를 손짓으로 물렸다. 〈나는 위스키를 원했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왜 나한테 위스키를 안 준 거지?〉 브라운은 그가 탈진해서 히스테리 상태일 거라고 예상했지만, 〈완전히 차분해〉 보였다.
고르디옙스키가 가택 연금 상태라는 소식에 에임스가 보인 반응은 그의 이중생활이 완전히 하나로 융합되어 그조차도 그 둘을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음을 보여 준다. 고르디옙스키를 KGB에 팔아넘긴 사람은 바로 에임스였다. 그런데도 자기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듣고 그가 가장 먼저 본능적으로 생각한 것은 영국에 그들의 스파이가 곤경에 처했음을 알려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랬다. 《맙소사, 그를 구하기 위해 조치를 취해야 돼! 런던에 전문을 보내 알려야 해.》 KGB에 고르디옙스키의 이름을 알려 준 사람이 나였다. 그가 구금된 것은 내 책임이었다. (……) 나는 그를 진심으로 걱정하면서도, 동시에 내가 그의 정체를 폭로했음을 알고 있었다. 미친 소리처럼 들리는 걸 안다. 나 역시 KGB 첩자였으니까.〉 어쩌면 그는 일부러 표리부동하게 행동한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직 절반만 반역자가 된 것일 수도 있었다.
「당신은 극장으로 가요.」 케이시가 말했다. 「지금 나는 이 도시에서 가장 재미있는 공연을 보고 있으니.」
고르바초프도 같은 생각일까? 케이시는 일종의 역할 놀이를 제안했다. 그렇게 해서 MI6의 비밀 훈련 기지에서 기묘한 냉전 연극이 펼쳐지게 되었다. 「당신이 고르바초프고, 내가 레이건입니다.」 케이시가 말했다. 「우리는 핵무기를 없애고 싶어 해요. 자신감을 불어넣기 위해 우리가 당신에게 스타워즈에 접근할 권한을 드리겠습니다. 어떻습니까?」 핵무기를 통해 서로를 확실히 파괴하는 시나리오 대신, 케이시는 핵무기에 대해 서로를 확실히 방어하는 방법을 제안하고 있었다. 고르바초프 역할을 맡은 고르디옙스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러시아어로. 「니옛!」
「좋습니다. 그럼 그걸 계속 추진하세요. 압박도 계속하고요. 고르바초프와 그의 부하들은 자기네가 당신보다 더 많은 돈을 쓸 수 없다는 걸 압니다. 당신 기술이 그들의 기술보다 더 좋아요. 계속 추진하세요.」 그는 소련이 결코 이길 수 없는 기술 군비 경쟁에 돈을 쏟아부어 스타워즈와 맞서려고 애쓰느라 스스로 거지가 될 거라는 말을 덧붙였다. 「장기적으로 SDI가 소련 지도부를 붕괴시킬 겁니다.」 어떤 역사가들은 포트 몽크턴에서 있었던 이 만남을 냉전 시대의 가장 중요한 순간 중 하나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 남자는 〈다른 것 같았다. 그의 얼굴에서 온화함과 친절함이 뿜어져 나왔다. 나는 너무 인상이 깊어서 미국의 가치를 보여 주는 산증인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는 내가 그동안 그토록 많이 들어 본 개방성, 정직성, 품위 그 자체였다〉. 고르디옙스키는 10여 년 동안 이중생활을 했다. 국가에 헌신하는 직업 정보 요원이면서 다른 편에게도 비밀리에 충성하는 생활이었다. 이런 생활을 해내는 솜씨도 아주 좋았다. 그건 올드리치 에임스도 마찬가지였다.
「이봐요, 분명히 합시다. 나는 주부였어요. 청소하고, 요리하고, 장을 보고, 남편과 자고, 아이를 낳고, 침대를 함께 쓰고, 남편의 친구가 되어 주는 것이 내 일이었다고요. 난 그 일을 잘했어요. 남편이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한 것이 고맙네요. 6년 동안 나는 완벽한 아내였어요. 남편을 위해 모든 일을 했어요. 여기 KGB에는 남을 감시하는 일을 하면서 월급을 받는 사람이 수천 명이나 있잖아요. 그 사람들이 남편을 몇 번이나 확인하고서 아무 문제 없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 날 비난해요? 좀 멍청한 소리 같지 않아요? 당신들이 일을 제대로 못한 거잖아요. 그걸 확인하는 건 내 일이 아니라 당신들 일이었다고요. 당신들이 내 인생을 망가뜨렸어요.」
「만약 남편의 탈출 계획을 미리 알았다면 당신은 어떻게 했겠습니까?」 한참 침묵이 흐른 뒤 레일라가 대답했다. 「그 사람을 보내 줬을 거예요. 남편에게 사흘의 말미를 준 다음, 충성스러운 국민으로서 당국에 신고했을 겁니다. 하지만 신고하기 전에 그 사람이 확실히 떠났는지 먼저 확인했을 거예요.」
그녀에게 남편이 영국으로 망명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기분을 묻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 반가울 뿐이었다.〉 고르디옙스키가 반역 혐의로 유죄 선고를 받으면서 부부의 재산은 몰수되었다. 아파트, 자동차, 짐 가방, 덴마크에서 가져온 비디오 녹화기까지 모두. 〈매트리스에 여기저기 구멍이 난 캠핑 침대, 다리미. 그들은 특히 다리미를 좋아했다. 수입산인 후버 제품이라서.〉
《당신은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했잖아. 난 아이들과 함께 여전히 여기에 있는데. 당신이 도망치고 우리는 포로가 되었어.》〉 그들은 서로를 속이고 있었다. 어쩌면 각자 자신마저 속이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두 번 다시 남편을 만날 수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삶은 계속되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아이들은 학교에 다녔고, 가끔 즐거워 보였다. 나는 단 한 번도 감히 아이들 앞에서 울거나, 내 영혼을 드러내지 못했다. 항상 자랑스러운 마음가짐으로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아직도 남편을 사랑하며, 남편과의 재회를 갈망한다고 말했다. 「서류상으로는 그의 아내가 아닐지라도, 내 영혼은 아직도 그의 아내입니다.」
〈올레크는 그들을 완전히 바보로 만들었다.〉 워커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올레크에게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처벌이 아내와 아이들을 붙잡아 두는 거였다.〉
《왜 내게 말하지 않았나? 어떻게 나를 버릴 수 있나? 우리를 구하기 위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가 그 여성을 계속 기억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 내 임무였다.〉
고르디옙스키의 반항심을 처음으로 건드렸던 베를린 장벽은 동유럽과 중부 유럽에서 반(反)공산주의 혁명의 물결이 일어나면서 1989년에 무너졌다.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 때문에 점점 해체되는 소련에 대한 KGB의 장악력도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겐나디 티토프 장군만 예외였다. 〈악어〉라는 별명을 지닌 그는 쿠데타가 시작되었을 때 마침 휴가 중이었기 때문에, 방첩부장으로 승진되었다. 〈첩보 활동이 과거에 비해 훨씬 더 힘들어졌다.〉 그는 쿠데타 시도 며칠 뒤, 그리운 듯이 이렇게 말했다.
가족이 재회하고 석 달 뒤, 소련은 해체되었다. 신문들은 고르디옙스키 가족이 포즈를 취하고 찍은 사진들을 게재했다. 그들이 행복하게 런던을 산책하는 모습은 소련이 정치적으로 격변을 겪고 있던 시기에 가정의 조화와 사랑의 힘을 보여 주었다. 공산주의의 종말을 때마침 상징해 주는 낭만적인 광경이 거기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실천했다. 그 점은 존경한다. 하지만 그는 내게 미리 묻지 않았다. 나를 휘말리게 만들면서 내게 선택권을 주지 않았다. 선택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나를 구원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애당초 나를 그 구렁텅이에 밀어 넣은 사람이 누구인가? 그는 이 부분을 잊어버렸다. 사람을 발로 차서 절벽 아래로 떨어뜨리고는, 손을 내밀면서 《내가 널 구했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는 정말 지독히 러시아적인 사람이었다.〉
레일라는 러시아와 영국을 오가며 생활한다. 마리아와 안나는 대학까지 영국 학교를 다녔고 지금도 영국에 산다. 고르디옙스키라는 이름은 사용하지 않는다. MI6는 이 가족을 돌보는 의무를 계속 수행하고 있다.
고르디옙스키의 KGB 동료들과 친구들도 그를 용서하지 못했다. 막심 파르시코프는 런던에서 소환되어 KGB의 조사를 받은 뒤 해고되었다. 그리고 평생 고르디옙스키가 왜 국가를 배신했는지 고민하며 살았다. 〈올레크가 반체제였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1980년대에 소련에서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누군들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반체제가 아니었을까. 런던 레지덴투라의 직원 대다수도 각각 정도는 다르지만 반체제였다. 우리 모두 서방 국가에 사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반역자가 된 사람은 올레크뿐이었다.〉 미하일 류비모프는 그의 반역을 개인적인 상처로 받아들였다. 고르디옙스키는 그의 친구였다. 함께 비밀을 공유하고, 음악을 듣고, 서머싯 몸의 작품을 이야기했다. 〈고르디옙스키가 도망친 직후 나는 KGB의 힘을 느꼈다. 거의 모든 옛 동료가 즉시 나와 연락을 끊고 만남을 피했다. (……) KGB가 나를 고르디옙스키 반역 사건의 주요 범인으로 언급하며 위협적인 지시를 내렸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제야 그는 고르디옙스키가 탈출하기 전날 저녁에 「해링턴 씨의 세탁물」을 언급하며 주었던 암시를 이해할 수 있었다. 류비모프는 비록 소련의 서머싯 몸이 되지는 못했지만, 소설, 희곡, 회고록을 집필했으며 냉전 시대의 가장 독특한 혼종으로 남았다. 소련에 충성하며 구식 영국인 같은 태도를 유지했다는 뜻이다. 그는 탈출 계획에서 중요한 순간에 자신이 KGB의 주의를 교란하는 데 이용되었다는 사실에 깊이 분노했다. 고르디옙스키가 영국식 페어플레이를 중시하는 그의 감정을 건드린 것이다. 두 사람은 두 번 다시 서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마이클 풋은 1995년 『선데이 타임스』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이 신문사가 고르디옙스키의 회고록을 연재하면서 〈KGB: 풋은 우리 공작원이었다〉라는 제목을 붙인 것을 문제 삼으면서, 이 기사를 〈매카시즘을 연상시키는 비방〉이라고 표현했다. 상당한 배상금을 받은 그는 그중 일부를 『트리뷴』의 운영 자금으로 썼다.
〈고르디옙스키 씨는 당신을 거의 용서했다!〉고 가서 말을 전하셔도 됩니다.」 인터뷰 영상이 끝난 뒤 코펠은 에임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가 당신을 거의 용서했다는 말을 믿습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에임스가 말했다. 「그의 말이 모두 아주 강렬하게 들립니다. 예전에 저는 제가 밀고한 사람들이 저와 비슷한 위험을 무릅쓰고 비슷한 선택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분별 있는 사람이 그 말을 듣는다면 이렇게 말할 겁니다. 〈저렇게 오만할 데가!〉 하지만 그건 오만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자신과 다른 스파이들의 행동이 도덕적으로 동등했다고 주장하는 에임스의 모습은 자신을 정당화하다 못해 거의 독선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고르디옙스키의 모습을 보고는 에임스도 후회 비슷한 말을 했다. 「제가 느끼는 수치심과 후회는 지금도 앞으로도 수그러들지 않을 겁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녀는 아들이 무고하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내 아들은 이중 첩자가 아니라, 지금도 KGB를 위해 일하는 삼중 첩자다.〉
2015년 7월 탈출 30주년 때 고르디옙스키 작전과 탈출 작전에 관련되었던 사람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일흔여섯 살이 된 소련 스파이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가 핀란드로 탈출할 때 갖고 있던 싸구려 인조 가죽 여행 가방은 현재 MI6 박물관에 있다. 30주년 기념 모임에서는 그에게 새 여행 가방이 기념품으로 증정되었다. 그 안에 든 물건은 다음과 같았다. 마스 초코바, 해로즈 백화점 쇼핑백, 러시아 서부 지도, 〈근심, 짜증, 불면증, 스트레스를 완화해 주는〉 알약, 모기 퇴치제, 차가운 맥주 두 병, 닥터 훅의 「히트곡 모음집」과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 카세트테이프. 가방 안에서 마지막으로 나온 물건은 치즈와 양파칩 한 봉지와 아기 기저귀였다.
나는 러시아에서 선동가로 비난받거나 아니면 최소한 무시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직 KGB 요원들의 반응은 놀라울 정도로 정중했다. 〈고르디옙스키 작전은 엄청난 성공이었다.〉 과거 PR 라인의 요원이었던 막심 파르시코프는 이렇게 썼다. 〈하지만 자진해서 스파이가 되겠다고 나타난 사람이 있었다는 점에서 그들이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와 달리 케임브리지 5인방의 경우에는 소련이 그들을 찾아내서 계발하고 포섭하는 데 훨씬 더 품이 들었다.〉
파르시코프와 류비모프 모두 소련을 문화적 황무지로 묘사한 고르디옙스키의 말에 화를 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전국 어디서나 클래식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파르시코프는 이렇게 썼다. 류비모프는 고르디옙스키가 런던에서 근무할 때 보낸 편지를 인용했다. 그도 영국의 문화에 크게 감탄하지 않는 듯한 내용의 편지였다. 〈당신이 말한 매력적인 모습이 제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연극, 박물관 등등. 저의 유일한 위안은 진지한 음악만을 방송하는 라디오 3입니다. 그 방송을 항상 듣습니다.〉 오히려 류비모프는 영국에 대한 애정을 조금도 잃은 적이 없다. 〈셰익스피어에서 루이스 캐럴과 르 카레에 이르기까지 영국 문학, 고양이, 위스키(특히 글렌리벳), 아기 곰 푸, 헨리 조정 경주, 애스콧의 경마, 런던의 공원, 코번트 가든, 테이트 미술관을 사랑한다. 심지어 킴 필비와 조지 블레이크로 대표되는 영국의 정보 세계도 좋아한다. 트위드 재킷과 플란넬 바지를 입고 시가 연기 속에 푹 빠지는 것은 정말 근사하지 않은가?〉
〈고르디옙스키를 MI6 쪽으로 밀어 보낸 가장 중요한 요인은 허영심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감히 말하지만, 그는 서방 세계에서 평범한 망명자가 아니라 소련에 반대하는 구세주처럼 보이고 싶다는 무한한 갈망을 갖고 있었다.〉 파르시코프도 KGB의 많은 동료 요원들이 〈딱딱하게 굳어 버린〉 크렘린의 지도력에 회의적이었지만, 적국을 위해 일하는 길을 선택한 사람은 고르디옙스키뿐이었음을 지적한다. 〈비록 그는 자신의 행동을 공산주의와 소련에 맞선 투쟁으로 정당화했지만, 올레크가 조국을 정말로 싫어했을까?〉
〈하지만 올레크가 과연 평생의 목표를 이뤘는지 궁금하다. 소련은 이제 존재하지 않고, 러시아에 사는 우리는 이미 공산주의를 잊어버렸다. 하지만 그것으로 세상이 더 좋고 안전한 곳이 되었는가?〉
이 책에 대한 반응 중에서 고르디옙스키 본인의 반응이 가장 만족스럽고 가장 짧았다. 그는 출간 전에 책을 미리 읽지 않고 출간 뒤 두 번 읽고서 흔들리는 글씨로 딱 한 줄짜리 평가를 내게 보냈다.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물론 이 책은 흠잡을 데가 없지 않지만, 대단하고 용감하고 복합적이었던 한 남자와 최근의 역사 중 중요한 시기에 세상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면 목적을 다 성취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