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난새
The gates to paradise are locked. It became private property. But we can go round the back and hop the f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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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membering PJ
2025.12.23

세대 죽이기라는 이름의 이라크 전쟁을 다룬 시리즈에서 그는 잠을 못 자는 통신병이다. 그 마른 얼굴에 선글라스가 씌워진 포스터. 다른 출연작으로는 유명한 더 와이어가 있고 내가 본 걸로는 션 베이커의 초기작들이 있다. 탠저린. 스타렛. 어쨌든 얼굴에 어울리는 배역들을 했다. 배우란 꼴에 의한 직업이다. 호리호리하고 허여멀건하고 울적한 인상. 정말로 그는 약물 과용 문제를 겪었었고 본격적인 출세작 이전에 극복했다.

 

극복. 사실 그건 끝없이 연기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소셜 미디어 스타처럼 굴던 그는 최근엔 포스트가 드물다. 21년 5월의 글을 기억한다. 안녕 팀. 당신은 나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겠네요. 내 이름은 제임스 랜슨, 하지만 당신은 나를 PJ로 알고 있겠죠. 나도 그를 PJ라고 기억한다(무슨 약자인지 여전히 모르고 아무도 모른다. 아마도). 그 편지는 사실상 그의 어린 시절 성학대에 대한 고발이다. 위협적인 아버지 아래서 자라난 그를 위해 행동 교정 차 불린 가정교사. 이십년이 지나 그걸 끄집어내는 이유는 아버지의 장례식 이후에서야 소지품을 정리하며 그의 성씨를 알아냈기 때문이었고, 그가 어느 학교의 교감으로서 여전히 일하고 있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그는 신고했다. 당시엔 코로나로 학교가 닫아서 아무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제임스는 결혼했고 그 해에 자식을 얻었다. 그 편지는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씌인 것이 아니라고 제임스는 밝힌다. 그는 단지 팀이 사임해야 한다고 말할 뿐이다. 심지어 말미에 그는 

 

그래서 나는 그들 중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린시절 비슷한 학대를 경험했다는 걸 알아요. 그들은 그들에게 일어났던 트라우마를 재현하면서 자신을 정당화 하고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이해하려고 들죠. 이렇게 생각해보면 당신을 학대한 사람도 가까운 사람이었나 봐요. 가족이었을 수도 있고요.

 

간청할게요. 당신 내면의 사건과 맞서세요. 

 

올해--2025년에 그의 출연작이 있는 걸 본다. 소셜 미디어의 신앙심 넘치는 글을 본다.  그가 아내와 자식을 가진 걸 안다. 그리고 어제 그의 부고를 듣는다. 타계는 꽤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고 자살했다고 내게 들려온 건 그들은 원치 않던 유출이었던 것 같다. 유족인 아내는 정신질환자 가족들을 위한 모금을 포스트했다. 거기까지 본다.

 

어떤 사람들은 부고 소식에 대고 지난 날의 성학대 고백을 연관 짓는 나같은 타인들이 역겹다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역겨운 인간, 그럴 수밖에 없다. 그의 배역 이상으로 그의 편지 한통에 위로받은 적이 있다. 언제나 생각했건대 어린 시절의 나쁜 경험은 결국 스스로를 그래도 싼 인간으로 자라나게 한다. 중독과 가학적 관계 끝에 어느 순간엔 반대로 가해자의 위치에 있는 나를 본다. 어떤 수치심은 한 순간에 있지 않고 삶 전체가 된다. 과거에 골몰하는 건 스스로를 망칠 좋은 핑계가 되어준다.

 

"용서는 스스로를 위한 선물입니다. 모두를 용서하세요" 마야 안젤루

 

그의 연기는 일종의 연극 치료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가 말로 할 수 있었던 것처럼 자신에게 관대했기를 바란다. 나보다는 스무 살이 많고 나의 아버지보다는 열 살 어리다. 여전히 그를 강한 인간이라고 기억한다. 사랑스럽고 그립다.

 

스파이와 배신자 (벤 매킨타이어)
2025.12.09

어느 서독 외교관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서 그는 젊은 덴마크 남성과 대화를 하게 되었다. 그 청년은 유난히 친절했으며, 상당히 취한 상태였다. 클래식 음악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가 함께 술을 마시러 가자고 청했지만, 올레크는 집에 가야 한다면서 정중히 거절했다.

그 청년은 덴마크 정보국의 공작원이었고, 그날의 대화는 올레크를 동성애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덴마크 당국은 동성애 포르노에 올레크가 관심을 보인 것에 착안해, 첩보 기법 중 가장 유서 깊고 가장 지저분하고 가장 효과적인 미인계를 준비했다.

〈나는 약 2분 만에 승낙했다.〉 고르디옙스키와 스푸너는 조용히 서로를 가늠해 보았다.  〈그는 내가 미리 꼼꼼한 브리핑을 듣고 예상했던 모습 그대로였다.〉 스푸너는 이렇게 말했다. 〈젊고 활기 있고 유능하고 절제되고 일에 잘 집중하는 사람.〉 이 설명은 스푸너 자신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성인이 된 뒤로 줄곧 첩보 세계에 깊이 발을 담갔고, 첩보 활동을 역사라는 프리즘으로 바라보았으며, 비유적으로도 실제로도 같은 언어를 사용했다.  〈나는 한 번도 그를 의심한 적이 없다. 전혀.〉 스푸너는 이렇게 말했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무엇을 믿고 무엇을 믿지 말아야 하는지 그냥 알게 된다. 스스로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올레크는 전적으로 믿을 만하고 정직한 사람이었으며, 올바른 동기가 그를 움직였다.〉  고르디옙스키는 스푸너가 〈일급 정보 요원이지만 정말로 상냥하고, 감정과 감수성이 충만하고, 개인적으로도 윤리적인 원칙 면에서도 정직한 사람〉임을 곧바로 알아보았다. 나중에 그는 스푸너를 가리켜 〈내가 만난 최고의 관리자〉였다고 말했다.

라이언 작전을 시작하면서 안드로포프는 첩보의 첫 번째 규칙을 어겼다. 자신이 이미 믿고 있는 사실에 대한 확인을 결코 요구하지 않는다는 규칙. 히틀러는 디데이에 적군이 칼레로 상륙할 것이라고 확신했으므로, 그가 파견한 스파이들도 (연합국 측이 심은 이중 첩자들의 도움으로) 같은 내용을 그에게 보고했다. 그것으로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성공이 확보된 셈이었다. 토니 블레어와 조지 W. 부시는 사담 후세인이 대량 살상 무기를 갖고 있다고 믿었으므로, 그 두 나라의 정보기관들도 당연히 그런 결론을 내렸다. 현학적이고 독재적인 유리 안드로포프는 핵 공격이 임박했다는 증거를 KGB 부하들이 찾아낼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으므로, 부하들은 그런 증거를 찾아냈다.

물론 서방에서는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헌혈을 한다. 그들에게 지급되는 것은 쿠키 한 개뿐이며, 때로는 주스 한 잔이 곁들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크렘린은 자본주의가 서구인들의 생활 구석구석에 스며들었을 테니 〈혈액은행〉이 정말로 혈액을 사고파는 은행일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그런 증거를 찾아냈다. 모든 인간의 행동은, 아주 샅샅이 훑듯이 들여다보면 점점 의심스러워 보일 수 있다.

「당신은 KGB 레지덴투라의 추가 멤버와 같아요.」 고르디옙스키는 스푸너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베터니를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는 북아일랜드의 경험에서 결코 회복하지 못했다.〉 그는 사투리를 쓰고, 자신의 것이 아닌 이미지를 연기하는 사람이었다. 가족도, 친구도, 사랑도, 확고한 신념도 없는 그는 대의를 찾아 헤매면서 자신에게 전혀 맞지 않는 일을 계속했다. 〈그는 진짜가 아니었다.〉 매닝엄불러는 이렇게 말했다. 첩보 세계의 독특한 스트레스와 비밀주의가 그를 현실에서 더욱더 먼 곳으로 밀어 버렸을 수도 있었다. 베터니가 다른 일을 택했다면 평탄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비밀 그 자체와 첩보 세계의 낭만에 흥분할 줄 아는 사람〉

〈고르디옙스키의 보고서는 (……) 다른 정보와 달리 소련 지도자들이 서구적인 현상들에, 그리고 그녀 자신에게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그녀에게 전해 주었다.〉 그는 크렘린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문을 열어 주었고, 대처는 감사의 마음을 안고 홀린 듯이 그 창문 너머를 들여다보았다. 〈대처 총리가 고르디옙스키에게 한 것만큼, 영국 총리가 영국 첩자에게 개인적인 관심을 쏟은 적은 없는 것 같다.〉

〈철의 여인〉(소련의 군 신문이 대처를 모욕할 생각으로 만들어 낸 별명이지만 대처 본인은 아주 좋아했다)

〈가슴이 두툼한 곰 같은 남자, 활기가 가득했다. (……) 드라마 같은 스파이 게임을 사랑했으며, 스파이로서 솜씨가 좋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이 비밀의 세계가 그에게는 집 같아서, 그는 스스로 설정한 무대에서 스스로 대본을 쓴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처럼 매 순간을 즐겼다〉

1세기 전 카를 마르크스도 자기 자식들이 영국 생활에 금방 적응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아이들은 그 소중한 셰익스피어의 나라를 떠난다는 생각만으로도 경악한다. 골수까지 영국인이 되었다.〉마르크스 부인의 말이다.

「나는 KGB 요원 집안에서 자랐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지. 내가 뭔가 했다는 사실을 언젠가 당신이 알게 될지도 모르잖아.」

페레스트로이카(개조)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 사실이기도 했다. 고르바초프에게 제출되는 KGB의 일일 브리핑 자료는 〈감사의 뜻이나 만족감을 나타내는 밑줄이 군데군데 그어진 상태로〉 되돌아왔다. 고르바초프가 자료를 상세히 읽고 있다는 뜻이었다. 〈양쪽 모두 우리한테 브리핑을 받고 있었다.〉 MI6의 분석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새로운 일을 하고 있었다. 정보를 왜곡하지 않고, 관계를 이어 가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기 위해 정보를 이용하려 진심으로 애쓰는 일. 몇 명 되지 않는 우리들이 역사의 첨단에서 놀라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KGB의 방첩 전문가인 니키텐코는 노란 눈으로 흔들림 없이 고르디옙스키를 바라보았다. 「흠. 제프리 하우에 대한 아주 좋은 보고서야.」 니키텐코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이었다. 「외무부 문서 같단 말이지.」

에임스는 CIA에서 낡았지만 친숙한 가구와 같았다.

〈일단 불가능한 것들을 걸러 내고 나면, 그 뒤에 남은 것이 무엇이든 아무리 거짓말 같은 것이라 해도 반드시 진실일 수밖에 없다〉

CIA는 올레크 고르디옙스키에게 임의로 티클이라는 암호명을 부여했다. 무해하고 사소한 국제적 경쟁에 어울리는 중립적인 이름이었다

막심 파르시코프는 친구의 달라진 모습 하나를 보고 확실히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숱이 적고 희끗희끗하던 머리카락이 갑자기 노란색이 섞인 붉은색으로 변했다.〉 소련식으로 희끗희끗하던 고르디옙스키의 머리카락이 하루아침에 이국적인 펑크 머리가 되었다. 동료들은 몰래 키득거렸다. 「젊은 애인이라도 생겼나? 아니면, 설마, KGB 런던 지부장 자리에 앉기 5분 전에 올레크가 게이가 된 거야?」 파르시코프가 어쩌다 머리가 그렇게 되었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어보자, 올레크는 조금 민망해하면서 아내의 염색약을 샴푸로 착각해서 잘못 썼다고 설명했다. 고르디옙스키의 새 황토색 머리카락과 레일라의 어두운색 머리카락은 서로 아주 달랐으므로 전혀 설득력이 없는 설명이었다. 〈《샴푸를 착각한 실수》가 일상이 되자 우리는 더 이상 그에게 묻지 않았다.〉 파르시코프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누구나 각자 이상해질 권리가 있다.〉

그들은 최종 결정을 고르디옙스키 본인에게 맡기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에게 모스크바로 꼭 돌아가야 한다고 강요하지도 않고, 이만 수건을 던지고 게임을 포기하라고 권하지도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건 책임 회피였다.〉 MI6의 한 요원은 나중에 이렇게 주장했다. 〈그의 목숨이 걸렸으니 우리가 그를 보호했어야 했다.〉

〈만약 그가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면 누구도 그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도 그런 시도를 하지 않았을 테고. 우리의 진심을 그가 깨달았던 것 같다. 나는 불편부당해지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날 저녁 고르디옙스키는 레일라에게 〈최고위급 회의〉를 위해 모스크바로 갔다가 며칠 뒤 런던으로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그는 불안하고 열성적인 표정이었다. 〈레지덴트로 확실히 확인받을 것이라는 말에 나도 들떴다.〉 그가 손톱을 하도 씹어 대서 속살이 드러난 것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다음 날도 소용돌이치는 내면과 연기하듯 꾸며 낸 겉모습이 섞여 똑같이 흘러갔다.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서로를 속이는 이상한 연극 속에서 고르디옙스키와 KGB는 모두 서로 보조를 맞추는 척하면서 상대가 발을 헛디디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절대 자백하지 마.」

〈우리가 최선을 다해 계획을 세웠다고 생각했다. 이제 모스크바 지부 사람들이 나서 줄 차례였다.〉 프라이스는 걱정만 하지 않았다. 그녀가 특별히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 사라졌지만, 그를 찾아내서 구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프라이스는 초여름 소련-핀란드 국경의 모기떼가 사납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모기 쫓는 약을 샀다.

〈오래된 초코바들이 우리 외투 주머니, 가방, 자동차 글러브 박스에 대량으로 쌓였다.〉 애스콧은 평생 킷캣 초코바라면 질색하게 되었다.

레일라는 그의 뺨에 재빨리 입을 맞추고 기분 좋게 손을 흔들었다. 「조금만 더 다정하게 해주지.」 그는 반쯤은 혼잣말로 이렇게 말했다. 곧 가족을 버릴 남자의 불평이었다. 이렇게 헤어지면 잘해야 무기한 이별이 될 것이고, 최악의 상황에는 그가 체포되어 불명예 속에 처형될 수도 있었다. 레일라는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 딸들의 뒤를 쫓아 북적거리는 상점 안으로 사라지면서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심장이 조금 부서졌다.

첩자와 담당관의 관계에는 직업적인 측면과 감정이 독특하게 섞여 있다. 뛰어난 담당관은 심리적 안정, 경제적 지원, 격려, 희망, 독특한 애정뿐만 아니라 보호받을 수 있다는 안정감도 제공해 준다. 첩자를 포섭해서 관리하는 데에는 그를 보살펴야 한다는 의무가 따른다. 첩자의 안전이 언제나 가장 우선이며, 위험이 보상을 능가하게 두지 않겠다는 암묵적인 약속이다. 모든 담당관은 이 약속의 무게를 느낀다.

〈핀란드화〉라는 말은 작은 나라가 자기보다 훨씬 강대한 이웃 나라 앞에서 이론적으로는 주권을 유지하면서도 사실은 협박에 무릎을 꿇어 굴복한 상태를 뜻하게 되었다.

〈서쪽을 모욕하지 않으면서 동쪽에 절하는 기술〉

그는 좋은 사람으로 여겨지기를 원했다. 그동안 자신이 전적으로 기만했던 KGB가 자신을 존중해 주기를 바랐다.

〈우리는 이 길에 마음을 바쳤다. 길은 하나뿐이니 계속 이 길로 나아가야 한다.〉

그들은 모든 독재 국가에서 기회주의자들이 하는 행동을 했다. 문제가 저절로 사라지기만 바라면서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두려움과 흥분은 식욕과 정신에 기묘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고르디옙스키는 덤불 속에 계속 숨어 있었어야 했다. 재킷을 머리 위로 뒤집어쓰고 모기들이 마구 날뛰게 두었어야 했다. 거기서 기다렸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다른 행동을 했다. 나중에 돌이켜 보니 거의 미친 짓이었다.  그는 비보르크로 들어가 술을 한잔하기로 했다.

레이철에게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비밀 승객이 트렁크 안에서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냄새였다. 땀, 싸구려 비누, 담배, 맥주 냄새가 뒤섞여 자동차 뒤쪽에서부터 퍼지고 있었다. 딱히 불쾌한 냄새는 아니었지만, 아주 뚜렷하고 강렬했다. 〈소련의 냄새였다. 평범한 영국 자동차 안에서는 맡을 수 없는 냄새.〉 냄새 맡는 개들이라면 이 자동차 뒤쪽에서 앞좌석 승객들과는 확연히 다른 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차릴 것이다.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에서 클래식 음악이 갑자기 최고 볼륨으로 터져 나왔다. 닥터 훅의 감상적인 팝송이 아니라, 고르디옙스키가 잘 아는 풍부한 오케스트라 소리였다. 아서와 레이철은 그가 자유의 땅에 들어섰음을 아직 말로 전해 줄 수 없었으나, 소리로 전할 수는 있었다. 핀란드 작곡가 잔 시벨리우스가 조국을 찬양하기 위해 지은 교향시의 유명한 첫 선율로.  「핀란디아」였다.

개가 차를 한 바퀴 도는 동안 캐럴라인 애스콧은 냉전 이전에도 다른 시대에도 배치된 적이 없는 무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는 스파이가 숨어 있는 트렁크 위에 플로렌스를 내려놓고 기저귀를 갈기 시작했다. 마침 아기가 시간을 딱 맞춰 기저귀를 푸짐하게 채워 준 참이었다. 캐럴라인은 냄새 나는 더러운 기저귀를 호기심 많은 셰퍼드 옆에 떨어뜨렸다. 〈개는 당연히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이렇게 후각을 교란하는 것은 원래 계획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기저귀를 이용하는 것은 즉석에서 생각해 낸 방법인데 효과가 아주 좋았다.

고르디옙스키는 그녀의 양손을 잡고 들어 올려 입을 맞췄다. 감사와 해방을 뜻하는 확실한 러시아식 몸짓이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나란히 선 캐럴라인 애스콧과 레이철 지를 향해 비틀비틀 걸어갔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그들의 손에도 차례로 입을 맞췄다. 〈처음에 덤불 속에서 나온 사람은 커다란 황소 같았는데, 갑자기 이렇게 정중하고 섬세한 몸짓이라니.〉 그는 어깨에 여전히 우주 담요를 걸친 채였다. 〈방금 마라톤을 마친 선수 같았다.〉

고르디옙스키는 프라이스가 정성 들여 싸온 샌드위치와 과일 주스를 손짓으로 물렸다. 〈나는 위스키를 원했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왜 나한테 위스키를 안 준 거지?〉 브라운은 그가 탈진해서 히스테리 상태일 거라고 예상했지만, 〈완전히 차분해〉 보였다.

고르디옙스키가 가택 연금 상태라는 소식에 에임스가 보인 반응은 그의 이중생활이 완전히 하나로 융합되어 그조차도 그 둘을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음을 보여 준다. 고르디옙스키를 KGB에 팔아넘긴 사람은 바로 에임스였다. 그런데도 자기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듣고 그가 가장 먼저 본능적으로 생각한 것은 영국에 그들의 스파이가 곤경에 처했음을 알려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랬다. 《맙소사, 그를 구하기 위해 조치를 취해야 돼! 런던에 전문을 보내 알려야 해.》 KGB에 고르디옙스키의 이름을 알려 준 사람이 나였다. 그가 구금된 것은 내 책임이었다. (……) 나는 그를 진심으로 걱정하면서도, 동시에 내가 그의 정체를 폭로했음을 알고 있었다. 미친 소리처럼 들리는 걸 안다. 나 역시 KGB 첩자였으니까.〉 어쩌면 그는 일부러 표리부동하게 행동한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직 절반만 반역자가 된 것일 수도 있었다.

「당신은 극장으로 가요.」 케이시가 말했다. 「지금 나는 이 도시에서 가장 재미있는 공연을 보고 있으니.」

고르바초프도 같은 생각일까? 케이시는 일종의 역할 놀이를 제안했다. 그렇게 해서 MI6의 비밀 훈련 기지에서 기묘한 냉전 연극이 펼쳐지게 되었다.  「당신이 고르바초프고, 내가 레이건입니다.」 케이시가 말했다. 「우리는 핵무기를 없애고 싶어 해요. 자신감을 불어넣기 위해 우리가 당신에게 스타워즈에 접근할 권한을 드리겠습니다. 어떻습니까?」  핵무기를 통해 서로를 확실히 파괴하는 시나리오 대신, 케이시는 핵무기에 대해 서로를 확실히 방어하는 방법을 제안하고 있었다.  고르바초프 역할을 맡은 고르디옙스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러시아어로.  「니옛!」

「좋습니다. 그럼 그걸 계속 추진하세요. 압박도 계속하고요. 고르바초프와 그의 부하들은 자기네가 당신보다 더 많은 돈을 쓸 수 없다는 걸 압니다. 당신 기술이 그들의 기술보다 더 좋아요. 계속 추진하세요.」 그는 소련이 결코 이길 수 없는 기술 군비 경쟁에 돈을 쏟아부어 스타워즈와 맞서려고 애쓰느라 스스로 거지가 될 거라는 말을 덧붙였다. 「장기적으로 SDI가 소련 지도부를 붕괴시킬 겁니다.」  어떤 역사가들은 포트 몽크턴에서 있었던 이 만남을 냉전 시대의 가장 중요한 순간 중 하나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 남자는 〈다른 것 같았다. 그의 얼굴에서 온화함과 친절함이 뿜어져 나왔다. 나는 너무 인상이 깊어서 미국의 가치를 보여 주는 산증인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는 내가 그동안 그토록 많이 들어 본 개방성, 정직성, 품위 그 자체였다〉.  고르디옙스키는 10여 년 동안 이중생활을 했다. 국가에 헌신하는 직업 정보 요원이면서 다른 편에게도 비밀리에 충성하는 생활이었다. 이런 생활을 해내는 솜씨도 아주 좋았다. 그건 올드리치 에임스도 마찬가지였다.

「이봐요, 분명히 합시다. 나는 주부였어요. 청소하고, 요리하고, 장을 보고, 남편과 자고, 아이를 낳고, 침대를 함께 쓰고, 남편의 친구가 되어 주는 것이 내 일이었다고요. 난 그 일을 잘했어요. 남편이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한 것이 고맙네요. 6년 동안 나는 완벽한 아내였어요. 남편을 위해 모든 일을 했어요. 여기 KGB에는 남을 감시하는 일을 하면서 월급을 받는 사람이 수천 명이나 있잖아요. 그 사람들이 남편을 몇 번이나 확인하고서 아무 문제 없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 날 비난해요? 좀 멍청한 소리 같지 않아요? 당신들이 일을 제대로 못한 거잖아요. 그걸 확인하는 건 내 일이 아니라 당신들 일이었다고요. 당신들이 내 인생을 망가뜨렸어요.」

「만약 남편의 탈출 계획을 미리 알았다면 당신은 어떻게 했겠습니까?」 한참 침묵이 흐른 뒤 레일라가 대답했다. 「그 사람을 보내 줬을 거예요. 남편에게 사흘의 말미를 준 다음, 충성스러운 국민으로서 당국에 신고했을 겁니다. 하지만 신고하기 전에 그 사람이 확실히 떠났는지 먼저 확인했을 거예요.」

그녀에게 남편이 영국으로 망명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기분을 묻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 반가울 뿐이었다.〉 고르디옙스키가 반역 혐의로 유죄 선고를 받으면서 부부의 재산은 몰수되었다. 아파트, 자동차, 짐 가방, 덴마크에서 가져온 비디오 녹화기까지 모두. 〈매트리스에 여기저기 구멍이 난 캠핑 침대, 다리미. 그들은 특히 다리미를 좋아했다. 수입산인 후버 제품이라서.〉

《당신은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했잖아. 난 아이들과 함께 여전히 여기에 있는데. 당신이 도망치고 우리는 포로가 되었어.》〉 그들은 서로를 속이고 있었다. 어쩌면 각자 자신마저 속이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두 번 다시 남편을 만날 수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삶은 계속되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아이들은 학교에 다녔고, 가끔 즐거워 보였다. 나는 단 한 번도 감히 아이들 앞에서 울거나, 내 영혼을 드러내지 못했다. 항상 자랑스러운 마음가짐으로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아직도 남편을 사랑하며, 남편과의 재회를 갈망한다고 말했다. 「서류상으로는 그의 아내가 아닐지라도, 내 영혼은 아직도 그의 아내입니다.」

〈올레크는 그들을 완전히 바보로 만들었다.〉 워커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올레크에게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처벌이 아내와 아이들을 붙잡아 두는 거였다.〉

《왜 내게 말하지 않았나? 어떻게 나를 버릴 수 있나? 우리를 구하기 위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가 그 여성을 계속 기억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 내 임무였다.〉

고르디옙스키의 반항심을 처음으로 건드렸던 베를린 장벽은 동유럽과 중부 유럽에서 반(反)공산주의 혁명의 물결이 일어나면서 1989년에 무너졌다.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 때문에 점점 해체되는 소련에 대한 KGB의 장악력도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겐나디 티토프 장군만 예외였다. 〈악어〉라는 별명을 지닌 그는 쿠데타가 시작되었을 때 마침 휴가 중이었기 때문에, 방첩부장으로 승진되었다. 〈첩보 활동이 과거에 비해 훨씬 더 힘들어졌다.〉 그는 쿠데타 시도 며칠 뒤, 그리운 듯이 이렇게 말했다.

가족이 재회하고 석 달 뒤, 소련은 해체되었다. 신문들은 고르디옙스키 가족이 포즈를 취하고 찍은 사진들을 게재했다. 그들이 행복하게 런던을 산책하는 모습은 소련이 정치적으로 격변을 겪고 있던 시기에 가정의 조화와 사랑의 힘을 보여 주었다. 공산주의의 종말을 때마침 상징해 주는 낭만적인 광경이 거기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실천했다. 그 점은 존경한다. 하지만 그는 내게 미리 묻지 않았다. 나를 휘말리게 만들면서 내게 선택권을 주지 않았다. 선택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나를 구원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애당초 나를 그 구렁텅이에 밀어 넣은 사람이 누구인가? 그는 이 부분을 잊어버렸다. 사람을 발로 차서 절벽 아래로 떨어뜨리고는, 손을 내밀면서 《내가 널 구했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는 정말 지독히 러시아적인 사람이었다.〉

레일라는 러시아와 영국을 오가며 생활한다. 마리아와 안나는 대학까지 영국 학교를 다녔고 지금도 영국에 산다. 고르디옙스키라는 이름은 사용하지 않는다. MI6는 이 가족을 돌보는 의무를 계속 수행하고 있다.

고르디옙스키의 KGB 동료들과 친구들도 그를 용서하지 못했다. 막심 파르시코프는 런던에서 소환되어 KGB의 조사를 받은 뒤 해고되었다. 그리고 평생 고르디옙스키가 왜 국가를 배신했는지 고민하며 살았다. 〈올레크가 반체제였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1980년대에 소련에서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누군들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반체제가 아니었을까. 런던 레지덴투라의 직원 대다수도 각각 정도는 다르지만 반체제였다. 우리 모두 서방 국가에 사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반역자가 된 사람은 올레크뿐이었다.〉 미하일 류비모프는 그의 반역을 개인적인 상처로 받아들였다. 고르디옙스키는 그의 친구였다. 함께 비밀을 공유하고, 음악을 듣고, 서머싯 몸의 작품을 이야기했다. 〈고르디옙스키가 도망친 직후 나는 KGB의 힘을 느꼈다. 거의 모든 옛 동료가 즉시 나와 연락을 끊고 만남을 피했다. (……) KGB가 나를 고르디옙스키 반역 사건의 주요 범인으로 언급하며 위협적인 지시를 내렸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제야 그는 고르디옙스키가 탈출하기 전날 저녁에 「해링턴 씨의 세탁물」을 언급하며 주었던 암시를 이해할 수 있었다. 류비모프는 비록 소련의 서머싯 몸이 되지는 못했지만, 소설, 희곡, 회고록을 집필했으며 냉전 시대의 가장 독특한 혼종으로 남았다. 소련에 충성하며 구식 영국인 같은 태도를 유지했다는 뜻이다. 그는 탈출 계획에서 중요한 순간에 자신이 KGB의 주의를 교란하는 데 이용되었다는 사실에 깊이 분노했다. 고르디옙스키가 영국식 페어플레이를 중시하는 그의 감정을 건드린 것이다. 두 사람은 두 번 다시 서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마이클 풋은 1995년 『선데이 타임스』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이 신문사가 고르디옙스키의 회고록을 연재하면서 〈KGB: 풋은 우리 공작원이었다〉라는 제목을 붙인 것을 문제 삼으면서, 이 기사를 〈매카시즘을 연상시키는 비방〉이라고 표현했다. 상당한 배상금을 받은 그는 그중 일부를 『트리뷴』의 운영 자금으로 썼다.

〈고르디옙스키 씨는 당신을 거의 용서했다!〉고 가서 말을 전하셔도 됩니다.」  인터뷰 영상이 끝난 뒤 코펠은 에임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가 당신을 거의 용서했다는 말을 믿습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에임스가 말했다. 「그의 말이 모두 아주 강렬하게 들립니다. 예전에 저는 제가 밀고한 사람들이 저와 비슷한 위험을 무릅쓰고 비슷한 선택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분별 있는 사람이 그 말을 듣는다면 이렇게 말할 겁니다. 〈저렇게 오만할 데가!〉 하지만 그건 오만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자신과 다른 스파이들의 행동이 도덕적으로 동등했다고 주장하는 에임스의 모습은 자신을 정당화하다 못해 거의 독선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고르디옙스키의 모습을 보고는 에임스도 후회 비슷한 말을 했다. 「제가 느끼는 수치심과 후회는 지금도 앞으로도 수그러들지 않을 겁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녀는 아들이 무고하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내 아들은 이중 첩자가 아니라, 지금도 KGB를 위해 일하는 삼중 첩자다.〉

2015년 7월 탈출 30주년 때 고르디옙스키 작전과 탈출 작전에 관련되었던 사람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일흔여섯 살이 된 소련 스파이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가 핀란드로 탈출할 때 갖고 있던 싸구려 인조 가죽 여행 가방은 현재 MI6 박물관에 있다. 30주년 기념 모임에서는 그에게 새 여행 가방이 기념품으로 증정되었다. 그 안에 든 물건은 다음과 같았다. 마스 초코바, 해로즈 백화점 쇼핑백, 러시아 서부 지도, 〈근심, 짜증, 불면증, 스트레스를 완화해 주는〉 알약, 모기 퇴치제, 차가운 맥주 두 병, 닥터 훅의 「히트곡 모음집」과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 카세트테이프.  가방 안에서 마지막으로 나온 물건은 치즈와 양파칩 한 봉지와 아기 기저귀였다.

나는 러시아에서 선동가로 비난받거나 아니면 최소한 무시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직 KGB 요원들의 반응은 놀라울 정도로 정중했다. 〈고르디옙스키 작전은 엄청난 성공이었다.〉 과거 PR 라인의 요원이었던 막심 파르시코프는 이렇게 썼다. 〈하지만 자진해서 스파이가 되겠다고 나타난 사람이 있었다는 점에서 그들이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와 달리 케임브리지 5인방의 경우에는 소련이 그들을 찾아내서 계발하고 포섭하는 데 훨씬 더 품이 들었다.〉

파르시코프와 류비모프 모두 소련을 문화적 황무지로 묘사한 고르디옙스키의 말에 화를 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전국 어디서나 클래식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파르시코프는 이렇게 썼다. 류비모프는 고르디옙스키가 런던에서 근무할 때 보낸 편지를 인용했다. 그도 영국의 문화에 크게 감탄하지 않는 듯한 내용의 편지였다. 〈당신이 말한 매력적인 모습이 제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연극, 박물관 등등. 저의 유일한 위안은 진지한 음악만을 방송하는 라디오 3입니다. 그 방송을 항상 듣습니다.〉 오히려 류비모프는 영국에 대한 애정을 조금도 잃은 적이 없다. 〈셰익스피어에서 루이스 캐럴과 르 카레에 이르기까지 영국 문학, 고양이, 위스키(특히 글렌리벳), 아기 곰 푸, 헨리 조정 경주, 애스콧의 경마, 런던의 공원, 코번트 가든, 테이트 미술관을 사랑한다. 심지어 킴 필비와 조지 블레이크로 대표되는 영국의 정보 세계도 좋아한다. 트위드 재킷과 플란넬 바지를 입고 시가 연기 속에 푹 빠지는 것은 정말 근사하지 않은가?〉

〈고르디옙스키를 MI6 쪽으로 밀어 보낸 가장 중요한 요인은 허영심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감히 말하지만, 그는 서방 세계에서 평범한 망명자가 아니라 소련에 반대하는 구세주처럼 보이고 싶다는 무한한 갈망을 갖고 있었다.〉 파르시코프도 KGB의 많은 동료 요원들이 〈딱딱하게 굳어 버린〉 크렘린의 지도력에 회의적이었지만, 적국을 위해 일하는 길을 선택한 사람은 고르디옙스키뿐이었음을 지적한다. 〈비록 그는 자신의 행동을 공산주의와 소련에 맞선 투쟁으로 정당화했지만, 올레크가 조국을 정말로 싫어했을까?〉

〈하지만 올레크가 과연 평생의 목표를 이뤘는지 궁금하다. 소련은 이제 존재하지 않고, 러시아에 사는 우리는 이미 공산주의를 잊어버렸다. 하지만 그것으로 세상이 더 좋고 안전한 곳이 되었는가?〉

이 책에 대한 반응 중에서 고르디옙스키 본인의 반응이 가장 만족스럽고 가장 짧았다. 그는 출간 전에 책을 미리 읽지 않고 출간 뒤 두 번 읽고서 흔들리는 글씨로 딱 한 줄짜리 평가를 내게 보냈다.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물론 이 책은 흠잡을 데가 없지 않지만, 대단하고 용감하고 복합적이었던 한 남자와 최근의 역사 중 중요한 시기에 세상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면 목적을 다 성취한 것이다.

그게 다예요, 친구들!
2025.12.08
가난한 자취생의 특별한 야식
 
자정이 넘어 편의점에 갔다가 첫눈을 봤다. 그때 난 엑스맨 매그니토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고. 다음날 은하와 도서관에서나와 저녁을 먹으러 갈때 다시 눈이 내렸다. 그다음날 출근할 때 본 눈사람
 
시공사 블랙프라이데이 배송왔는데 택배테이프가 스파이디라서 웃었음
 
대구에서 뵈었던 팟이 감사하게도 대전에! 사실 애프터눈 티세트는 얼마나 실하든간 먹을 때마다 이값일 일인가 싶긴하다. 왜냐면 초코파이 24개입 먹으면 되잖아

(물론 경험을 사는 것이다. 맛있었다)

예약 시간대에 세팀이 있었는데 사장님이 박수 짝치고 디저트에 대해 설명하신다. 파인다이닝 쉐프랑 다를게 없는데 그 중앙에서 서서 박수짝이 너무 더메뉴의 랄프 파인즈를 연상시켰달지

 

근처 안경점에 잠깐 들렀는데 수조가 얼마나 많던지 거의 횟집이었음

 

 

헤어지기 전에 노래방에서 오타쿠 노래 불렀는데 <이름 없는 괴물>을 모두가 아는 건 아니더라. 문화충격

대전역에서 헤어졌다. 벌써 그립고 다시 보고 싶다

 

이번 주에 읽은 코믹스들

그렇다 이제 나는 엑셀에 트래커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친구가 먼저 낸 아이디어였는데 내가 먼저 완성했다. 이런 식의 자폐적인 정리 작업에만은 좀 우수하다

 

JLI 초반 이슈들. 말도 안돼 이렇게 재밌다고? 키스 기펜과는 개그코드가 잘맞는다 수준이 아니라 나의 뇌를 가져다가 80년대에서 연구해 내놓은 코믹스 같다.

냉전 시기의 정치적 산물이며 인터내셔널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시절 국제정세를 읽을 수 있다. '진짜 깡패국가 러시아'가 등장하고 레이건이 패널 속에 있다(우리의 가이 가드너는 그를 심지어 '로니 보이'라고 부른다).

 

애니멀맨은 이슈마다 소재로서 완결성 있다 볼 수 있고 그런면에서 마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단편집을 보는 기분도 든다. 버디 베이커의 능력은 동물의 성질을 빌려와 사용하는 것인데, 어찌보면 쉐이프시프티가 아닌 비스트 보이랑 다를 바 없는 거 아냐?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시리즈의 작가가 그랜트 모리슨이란 걸 생각해보자. 능력이 스케일이 아주 미시적이어지거나 아주 거시적이어질 때. - 거기에 메타픽션까지 더해지다니. 이슈 #4 #5 #6 은 매편 전율하면서 읽었는데, 특히 #4는 DC 최고의 이슈로 꼽을 수도 있다.

 

<52> 만화도 훌륭하지만 이런 작업을 시도한 것 자체가 훌륭하다. 지금까지의 많은 역사를 하나의 세계관 안에 통합해놓고 스토리상의 교통 정리까지 하려는 시도. 52개의 우주라는 세계관 정립. (그런데 이렇게 해놓고 뉴52라는 이름이 망친다고? 믿기지 않네.) 게다가 그 고된 작업을 삼류 캐릭터와 오리지절 캐릭터들에게 몫을 주었으며 가장 훌륭한 필진들을 데리고 합작으로 내놓게 했다.

 

르네 찰리 케이트에 대해서, 마이클과 테드에 대해서, 버디와 코리와 아담 스트레인지에 대해서, 스틸에 대해서, 랄프에 대해서 할 말이 많아지고 애정을 참을 수 없다. 심지어 광인 과학자들도 더보이즈에나 나올 것만 같은 틴에이지 히어로팀도 강렬하다. 절대로 모든 캐릭터를 알 수 없는 세계관에서 모든 캐릭터를 사랑하게 만든다는 건 뭘까?

80억 인류에 대한 인류애? 휴머니스트야 이거?

 

단행본에서는 작가 노트란을 볼 때마다 이런 재밌는 이벤트의 일원이 된 인간들이 창작하는 마음으로 무척 부럽다. 한편으로 라이터진 빅4는 캐릭터들 제각각이 그린 듯하게 생생하고 원탁 회의의 풍경이 상상되는 것이다. 특히 그랜트 모리슨...(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스코틀랜드어를 하는 주정뱅이, 자폐인, 천재다)

키스 기펜 역시 주변의 증언은 물론 당신이 쓴 작가 노트만 봐도 성격이 보인다. 안타까운 청소년 살해 장면에다 대고 "징징대는 꼬맹이 짜증났는데 시원하게 보내버렸다"라고 하는 터프함

그리고 새삼스럽지만 그렉 러카가 쓰는 여자 캐릭터가 좋다. 그의 현실적이고 좁은 이야기들, 내면으로 파고드는 음울함에 매료된다.

정말 이런 기획은 다시 없을 만하군. 마치 텔레비전 시리즈를 만들기 위해 정말 많은 작가진이 모여 매일 출퇴근하는 광경 같은

 

내 어깨를 흔들어 보세요. 살아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2025.11.30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올리브 나무 사이로>와 <체리 향기>를 보았다. 둘 다 마지막의 긴 시퀀스가 인상적인데, 황금종려상을 받았다는 체리 향기 쪽이 더 묵직하게 와닿는다. 자신을 땅 속에 묻어 죽여달라고 부탁하며 히치하이커를 태우는 남자. 그는 말단 군인과 신학생을 거쳐 어느 박제사 노인에 이르러 체리 한 알에 관해 이야기를 듣는다. 그가 비와 천둥 속에서 눈을 감았을 때 보이는 눈꺼풀. 그 조용한 어둠. 마지막에 다소 어색하게 삽입된 메이킹 필름은 마치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그렇게 눈을 감는 것으로 끝나는 영화가 또 있었는데. 아마도 Cerrar los ojos.

 

주말 저녁 늦게 원오의 집에 찾아간다. 어김없이 그의 집 고양이는 낯선 나를 무척 좋아해서 꼬리를 흔든다. 다음날 아침엔 혜화에서 이태원으로 간다.

 

원래는 경연을 만나려고 했는데 전날 밤 너무 늦게 잠든 그는 뒤늦게 경기에서부터 출발하기 너무 고되었나 보다. 단둘이서 사라바나 바반에 갔다. 도사라고 하는 빵과 콜리 플라워 튀김을 먹었고 아주 매운 카레들. 향신료가 들어간 카레에 익숙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는데 이번주의 컨디션은 영 아니었는지 매운 음식을먹기가 너무 힘들었다. 다행히 원오는 예상했듯 너무 좋아했고 "근데 내가 인도 음식을 좋아해" 그가 말하면 내가 "알아 씨발"이라고 답한다.

 

일부러 평일에 시간을 내어 이태원을 향한 것은 그래픽에 가기 위해서였다. 여긴 정말 한국어 정발본은 다 있었고 난 블랙키스트 나이트 세권을 읽기로 목표한다. 세 책을 이슈마다 번갈아 읽으면서, 그리고 삼십여 분간 졸면서. 그린 랜턴 다섯 권을 읽은 다음에, 수어사이드 스쿼드 배드블러드와 할린을 읽었고, 폴 디니와 알렉스 로스의 월드 그레이티스트 히어로즈 시리즈까지 본다. 원오는 그동안 하비비(나의 추천작이었으나 정작 나는 읽지 못했다), 나우시카, 피의 흔적을 보았다. 우린 한 시가 조금 넘어서 도착했는데 나갈 때는 열 시였다. 내려갈 땐 이태원 골목을 밤나들이하듯 걸어서 녹사평역에서 전철을 탔다.

블랙키스트 나이트에 대해서: 블랙 랜턴이 좀비 같은 거였다니. 스케일은 오히려 시네스트로 군단의 역습이 더 큰 것 같고, 오히려 이 이야기는 과거의 죽은 인물들을 애도함과 동시에 되살리는 것이기도 하다. 본편이 가장 화려하고 작화도 멋있지만 토마시의 군단 이야기도 좋았는데, 시네스트로와 소라닉 나투의 관계는 마치 다스베이더와 루크 스카이워커 같고, 소담 야트의 희생, 카일 레이너와 가이 가드너의 의외의 우정이 마음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월드 그레이스트 히어로즈 시리즈의 좋은 점은 물론 첫째로 알렉스 로스의 경외감 드는, 장엄한 작화고, 나머지는 이들이 "하늘 높이에서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세계의 낮은 곳에서 활동하는 모습 때문이다. 원더우먼이 히잡을 두른 여자들 사이에 숨어있다가 그녀의 수영복 같은 코스튬을 드러내거나, 빌리 뱃슨이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이웃집 아저씨의 문을 두드린다거나.

 

약속 날짜가 이번주말이 된 건 순전히 영상자료원에서 토요일에 <백색 공포>를 상영했기 때문이다. 원제 Panic in the Needle Park인 이 영화는 어린 시절의 알 파치노가 주연했으므로 나름 우리의 위시 리스트에 있었기 때문이다. 영자원에서는 사랑과 중독이라는 테마로서 <크리스티아네 F: 우리는 초역의 아이들>이라는 영화를 연달아 상영했는데 그것도 함께 보았다. 그건 또 데이빗 보위가 나온다는 이유로 골랐지만 막상 보니 보위는 배역이 없었고 정말로 보위였다. 등장인물들이 보위 팬이었다. 두 영화는 약쟁이 남자에게 사랑에 빠져서 약을 시작했다가 몸을 팔게 되고 파멸하는 여자들이라는 스토리 라인을 공유하는데, 사실 백색공포는 마약에 대한 위기감을 주는 영화는 아니었고, 크리스티아네 F는 슬펐다(그들은 너무 어린 아이들이었고 약을 주고 몸을 사는 행인은 어른들이었다. 그리고 금단증상을 견뎌내는 그 지옥도).

마침 영상자료원에서는 디깅 사운드트랙 전시를 하고 있어서 이 수많은 피지컬 앨범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이런 데에 오면 사실 아는 척하는 재미밖에 없지만. (한국) 영화의 역사에 대한 상설 전시도 돌아다니는 재미가 있었고. 언제나 KOFA 상영관만 갔던 나였으니

 

화곡동 니코니코 라멘. 이건 우리가 저녁은 뭐 먹고 헤어질까 하다가 나온 아이디어로 우리 중엔 라멘 마니아가 있기도 했거니와 '여왕의 먹이' 만화에 출연한 식당이기도 하다(일종의 성지순례). 이날이 아니면 영영 여기에 들를 수 없을 것 같기도 했다. 너무 맛있는 매운 돈코츠 국물과(난 장을 반이나 덜어놓고 먹었다) 탱글탱글한 차슈와 달걀

 

길가다가 니들 파크에서의 중독자들 흉내내잡시고 컨셉샷 찍음. 왼쪽분 다리가 너무 기네요

 

지영 씨를 만났고 그녀가 맞기 전에 우리는 화곡에서 혜화로 막 온 참이었다. 그게 20시쯤이었는데 그녀는 21시 20분 무렵에 왔고 집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기 (정확히는 신발을 신고 벗기가) 귀찮았던 우리는 길가에서 시간을 때웠다. 집 앞이지만 평생 먹지 가지 않을 것 같은 카페에 간다든가 무인 가챠샵 따윌 본다거나 거리에서 라이브 콘서트하는 아마추어 가수들한테 "내가 불러도 이거보단 잘 부르겠다"고 비아냥하거나 공원 놀이터의 나무 도막을 타고 오르고 뭐 그런 식으로.

아무튼 우린 고스트 마라찌라는 상품을 먹고(마라샹궈인데 닭이 들어간 음식으로 네이버 스토어에서 파는데 배송이 12일 걸렸다) 두부게이 음료를 마시고 대화한다. 새벽 세시까지 대화한다. 잠이 오지 않을 것 같다고 멜라토닌 구미를 두 개 도핑해놓고 한 시간을 더 누워 이야기하다가 잠든다. 코믹스 캐릭터 얘기를 하다가 게임 얘기를 하다가 서로 누워서 근육 풀어준답시고 마사지도 하다가. 원오는 사소한 자기 얘기는 꽤 많이 하고 언제나 주제를 자기쪽으로 전환해버리곤 하면서도(그런 게 매력일 것이다), 사실 게임을 한다든가 덕질을 한다든가에 대해서는 부끄러움을 갖고 의외로 삼가는데 이날 보니 원오가 얼마나 게임에 미쳐 살았는지 알겠다. 그리고 그는 나와 달리 거기서 인생을 살고 감정을 소비할 줄 아는 사람인 것이다. 타고난 이야기꾼이기도 하다

 

다음 날 아침에 난 너무 늦게 일어났고 우린 한 시가 넘어서야 점심을 먹는다. 그리고 장한평에 가서 소기의 목적이었던 다이스 라떼에 간다(전주부터 미안하다곤 했지만 원오는 거의 나에 의해 한 주말을 끌려다녔다. 물론 좋게 말하자면 우린 공통의 친구를 만나고 난 거의 파티 플래너로서 수행하고 있었다). 다다음주에 연다는 행사 서울 코믹 위크에 대한 예비 탐사로서 트래비스 무어의 커버도 사고 나의 프리오더 주문을 픽업하기 위해서. 전자상거래에서는 한달씩 고민하고 사지만 이런 가게에 오면 마치 마이클 잭슨처럼 여기부터 여기까지 다 주세요 라고 말하게 된다. 단행본도 있는 고담 센트럴을 몇 권 샀다(제일 좋아하는 이슈가 포함됐다는 이유로. 그 표지를 좋아하니까). 빅 이벤트인 DC KO와 나이트 파이트. used book이지만 원더우먼 gods of the gotham도 샀고(필 히메네즈의 그림을 좋아해서), 앱솔루트 배트맨의 볼륨 1(이게 벌써 나왔구나)과 쌩뚱맞게도 맥스웰 로드에 대해 엮은 책을 샀다. countdown to infinite crisis를 보면서 테드 코드와 부스터 골드에 빠진데다가 덕분에 요근래는 키스 기펜의 JLI를 읽고 있기 때문에. 그 책이 그것들과 sacrifice에서 원더우먼이 맥스웰 로드를 죽이는 장면 등을 엮어놓았다. 어쨌든 실물로 갖고 있을 만한 나쁘고 좋아하는 패널들이라서(죽는 장면들이 좋아하는 장면들이라고? 그렇다)

KO의 폴리백 커버를 사가는 사람은 많았어도 매장 안에서 뜯어보는 사람들은 우리가 처음이라며 사장님이 구경하셨다. 지영씨가 코믹위크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기 때문에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눴다(친절하셨다).

장한평에서 우리는 헤어졌다. 난 원오의 집에 손목시계와 티셔츠와 속옷을 두고 나왔다. 돌아오는 길에는 어김없이 옆자리 사람의 어깨에 머리를 기울이며 잠들었던 것 같다. 사과했지만 그는 이어폰을 끼고 있어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시내버스에서는 발을 밟혔는데 밟은 사람이 두리번거리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난 민폐를 끼치고 있고 또 폐를 입는다. 지영씨에게는 그녀가 좋아하는 영화 굿즈들을 가져다주었는데 그녀 역시 내게 선물을 주었다. 세상에는 총량이라는 게 있어서 잃는 만큼 얻는 것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무능에 대해서 비난할 수 없게 된 것은 내가 무능해진 이후였다. 왜 경험해 본 다음에야 연민할 줄 알게되지? 그러고 보니 원오가 <하비비>를 읽고 똑같은 얘기를 했다.

 

네이버 블로그 챌린지 때문에 쓴 문단: 스포츠 글감을 첨부하란다. 사실 난 열광적인 스포츠 팬이 되어본 적이 없다. 내 아버지는 프로야구가 개막하기 전에 고교야구부터 좋아했고 창단 때부터 엘쥐를 응원했다. 요근래 우승하고 코리안시즌에서도 왕좌를 지킨 이 구단에 아빠는 얼마나 설렜을까. 금요일에 그가 전화했는데 받지 못했다. 토요일에 건 전화를 받고 보니 왜 부재중 전화를 보고 콜백하지 않느냐며 꾸지람을 들었다. 노느라 정신이 없었다며 변명하는 나에게 그는 그게 아니라 그만큼의 애정 아니냐며 투정을 부렸다. 가벼운 장난이겠지만 자식된 도리로서 갑자기 사무치게 미안했다. 가끔 나도 소홀한 상대방에게 내가 그정도 우선순위라는 데에 너무 괴롭다. 하지만 내 아버지는 언제까지고 전혀 그러지 않을 냉혈한인 줄 알았는데.

IT'S ABOUT ACTION
2025.11.23

졸전을 보러 온 다운씨와 오랜만에 청주에서 만났다. 그날은 내 강의도 일찍 끝나 오후 서너시부터 점심을 먹고 카페에서 죽치다가 노래방도 갔다가 세시간 하는 영화까지 본다. 우리는 삼년 전에 여기서 자주 만났던 추억을 되새긴다. "좋은 시절이었죠. 그땐 그게 좋은 줄도 몰랐는데" 마치 이상은의 언젠가는 가사 같은 말이 나온다. 노래방에서 애니메이션 주제가 같은 걸 부르는데, 세상에 십년 혹은 십오년 전에나 듣던 노래를 아직도 이렇게 잘 부를 수 있다니.

 

<국보> 영화는 패왕별희를 연상할 수밖에 없는데(그건 경극이고 이건 가부키, 어쨌든 전통극에서 여성 배역을 연기하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 '온나가타'라는 소재), 문화대혁명을 겪으며 폐허가 된 중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현대에까지 이르러 국보가 된다는 이야기. 그 과정에서 캐릭터는 오로지 무대에서 연기함에만 정신을 쏟고 주변의 풍경은 뒷전으로 한다. "당신을 내 아버지라고 생각한 적 없고 당신은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이에요. 하지만 당신은 최고의 연기자군요"라고 인정하는 희생된 가족들. 영화는 선형적으로 흐르지만 관객에게 보여지는 시간은 분절적이다. 마치 노인이 자신의 일대기를 회고하는 것처럼.

 

블랙 프라이데이를 맞아 책을 몇권 주문했기 때문에 자리를 만들기 위해 책장을 또 정리했다. 주에 한권 이상은 구매하다보니 주말마다 이짓을 하게 된다. 일본 만화 칸은 죽으려고 하는 게 눈이 보이고. 소설 포함 일반도서 단행본은 대부분 거실 책장에 꽂아두었는데 역시 저런 식이다. 세운 책 위에 눕히고 책장 정리라기보다는 테트리스에 가까운 행렬.

 

Countdown to Infinite Crisis - The OMAC Project - Sacrifice - Villains United - JLA Crisis of Conscience 이 여정을 달린 뒤 드디어 <인피닛 크라이시스>를 읽었다. 본편만큼이나 이전의 미니 시리즈들이 재밌었다. 특히 부스터 골드와 블루 비틀의 이야기.

"당신 지구의 딕이 내 지구의 딕보다 나은 거요?" … "아니."
"완벽한 세계엔 슈퍼맨이 필요 없지."
"It's about what you do…" "…It's about action."

주제면에서는 킹덤 컴하고도 비슷한데, 마크 웨이드랑 알렉스 로스가 이미지 코믹스의 출현과 함께 타락한 90년대 DC에 대한 일종의 회한을 그려냈기 때문에. 다만 그것은 창작자로서 신화적인 인물들로 쓰겠다는 다짐이고, 그런 동시에 인간 곁에 있어야 된다는 모티브(데일리 플래닛 다이너로 대표된)를 담아낸다.

반면 인피닛 크라이시스에서는? 제프 존스가 사람들은 나이트폴을 잊지 않는다고 밝혔듯, 제이슨이 죽고 배트맨이 베인한테 허리 부러진건 모두가 기억하는 역사다. 앨런 무어는 애들 보는 만화를 이 지경으로 만든 이 짓거리를 끝내자고 하고, 우리(독자)도 정말 슈퍼맨과 저스티스와 골든 에이지를 그리워하는데(심지어 잘못 쓰인 캐릭터들을 한심해하고 내가 해도 더 낫겠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크라이시스로 초기화하고 리부트한다고 해서 없던 일이 되나? 그 세계가 과연 더 나은 세계가 되나?

인피닛 크라이시스는 정말이지 제프 존스--한때 팬보이였던 작가가 쓴 책이고 독자로서 역사를 총망라한 것이다. 당신들이 해왔던 모든 한심한 것들이--다른 말로 하자면 당신들이 써왔던 모든 한심한 이야기들이 정사라고. 개중에는 좋은 것들도 있었고 나는 그 모든 것을 보면서 자라왔다고 말이다. (이후에 모리슨이 쓴 배트맨을 생각해보면 더 세련된 방식으로 과거의 유산을 오마주할 수도 있다는 걸 알 수 있지만. 이 이벤트가 더 이전이었으며 또 이 투박한 애정 만큼은.)

 

아주 멋진 그린 링 젤리 사진

크라이시스와 병렬적으로 그린 랜턴 시리즈를 읽고 있고, 오늘로써 <시네스트로 군단의 역습>을 끝냈다. 기대를 많이 걸었는데, 어쩌면 난 스케일에서 재미를 보는 타입보단 미시적이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필요한 것 같다. 내주 주말에는 이태원 그래픽에 가서 블랙키스트 나이트 시리즈를 읽을 생각이다. 결국 <52>와 <파이널 크라이시스>는 읽지 못하고 가는군.

내년엔 졸업하지만, 가능하다면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기숙사에 살고 싶어서 동기와 함께 입사 신청을 하려고 한다. 요 근래 매일같이 도서관에 함께 가곤 하는 그도 나처럼 복수전공생이라 마지막 학기까지 취업하지 않았고, 우리는 둘 다 취업전선에 바로 뛰어들기보다는 시험에 매달려보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이렇게 마라톤하듯 코믹스를 읽고 쳐야하는 마감에 맞춰 글을 쓴다. 어쨌든 불안이 있을지언정 자기혐오와 싸우진 않는다. 내 체념, 사람들은 그게 나쁜 개념인 줄 알지만 누군가에겐 구원이라는 것, 나는 일종의 히피이고 멋진 하루를 꾸리는 게 멋진 인생으로 확산하리라고 자위한다. These are crazy days but they make me shine... Time keeps rolling by...

그래야 내 안의 내가 살 수 있는 거예요
2025.11.16

https://youtu.be/J35bGfK8Dp0?si=aselZ6tK21uwB9YQ

비틀즈 풍의 이 노래는 한국에서 오정선이 마음이라는 제목으로 번안해 불렀다(백순진이 편곡했다). 그 노래의 가사가 좋은데, "하늘엔 별들이 흩어져 내리고 / 언덕엔 꽃들이 바람에 날릴 때 / 나는 어여쁜 소년의 손에 의해 / 사랑 가득한 세계로 날아 가리, / 살며시..." 특히 내 아버지는 이 "살며시..."를 좋아했다.

 

<스파이와 배신자> 여전히 읽고 있다. 일전에 내가 '한 인물을 만드는 일이 한 세계를 만드는 일보다 못하지 않다(혹은 더 위대하다)'고 말한 적이 있지 않나? 이 책의 재미와 감동은 KGB나 MI6라는 기관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지나온 냉전과 안보 범죄의 시대 때문이 아니라, 올레크 고르디옙스키라는 인물의 평범성에서 온다. 그의 지겨운 감정과 지적 허영이라는 캐릭터성, 소비에트를 떠나겠다는 의지, 더 자유롭고 민주적인 세계가 있고 그것이 옳으리라는 '믿음' 때문에.

 

<부고니아>는 우리나라 영화 <지구를 지켜라>의 요르고스 란티모스 버전 리메이크다. 지극히 란티모스답다는 생각 그리고 그답게 오만하군. 원작은 자본이 망가뜨린 개인을 그렸고 결국 이 영화에서도 자본가 캐릭터를 차용했다면 이런 선택을 하면 안 됐다. 결국 '다 죽자'잖아? 인간은 다 개새끼들이고 우리끼리 싸워봤자 어차피 기후위기로 망합니다 라니. 이게 무슨 의미가 있지? 이런 식의 냉소 혹은 선민의식이.

 

<배트맨 나이트폴> 이 시리즈는 중고서점에서 읽고 먹튀하려고 했는데 읽고나서 그냥 사버렸다. 모르겠다 이제 난 공간이 없다. 내 책장은 점점 부모님 등골만치 휘어지고 방안의 텍스트 농도는 점점 짙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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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 유 씨 미 3> 기대 안 했는데 나름의 세대교체 영화였고 난 틴에이지 가족무리 같은 거는 나쁘게 볼 수가 없다(틴 타이탄즈의 영향일지도). 이하 오타쿠처럼 reference 설명하자면: 제시 아이젠버그가 아기들 인솔하는 이민용이고, 로자먼드 파이크가 대디이슈 서브미시브 백인여자 악당이고, 투게더 남편 사랑스럽게 나오고, holdovers 남자애가 f1찍고, 토마스 제퍼슨 응징서사고, 카드 표창 보자기 액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방 등 볼거리가 화려해서 너무 재밌었음

 

이렇게 놈팽이 한량같은 근래를 보내는 와중에도 졸업 작품 전시회를 마쳤다. 산만한 시기였으며 정신 없는 하루였다. 심사상 조건은 무사히 마쳤으니 이제 수업만 말아먹지 않으면 졸업조건을 충족한다. 이걸 마친 다음날 단톡방엔 무임승차한 조원 졸업재심사하라느니 고발하는 카톡이 올라오며 갑자기 분위기가 싸늘해지는 해프닝이 있었는데 물론 내 일은 아니다. 난 수월했고 우리는 그렇게 공을 들이진 않았지. 모두가 이렇게 졸작을 애정없이 하진 않을 텐데, 모두가 이렇게 졸업학년을 감흥없이 보내지도 않을 거야. 그렇지만 돌이켜보면 올해는 졸업시험과 졸업작품 모두를 한꺼번에 마쳤다. 내가 분명 못난 인간일지언정 실패하진 않았다. 이미 밑바닥까지 와있다, 어쩌면 지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옥은 아니다.

 

전시회가 끝나고 저녁 먹기 전 시간에 우리는 거의 한시간동안 카톡을 나눴다. 우리가 누구냐면 나와 일전에 내가 고담센트럴과 왓치맨을 구매한 판매자다. 그러니까 도서관 희망도서에 '그래픽노블'은 웹툰과 달리 신청할 수 있다는 얘기를 해주셨고(난 아이스너가 주장한 그래픽노블 이라는 단어가 너무 젠체하는 듯해서 싫었다.-번역하자면 '회화문학'이잖은가? 하여간 그건 미메시스류의 예술적인 유럽만화에는 그럴듯 듯하지만 dc나 마블 같은 레이블에 붙을 프리미엄 라벨은 아니다. 그런데 그 덕을 보는 것이다!) 그뒤로 얘기가 이어진 것이다. 난 세종 도서관이 국립 중앙 도서관 만큼이나 도서가 많다고 알려드렸고 우린 거기에 언젠가 함께 갈 수도 있다. 우린 서로의 책장 사진을 공유했고 서로 없는 책들은 빌려 읽자고 약속했다(물론 그걸 읽기 전에 갖고 있는 책부터 읽어야겠지, 콜렉터들이란!). 이제 우린 친구가 된 것 같다.
그리고 블랙 프라이데이와 절판작 콜렉팅의 기쁨과 어려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sns 계정을 공유받는다. "책장 맨 위칸에 데미안이 두 권 있던데 헤세를 좋아하세요?" "사실은 중학교 때 읽었는데 나중에 한 권은 선물받았어요" 페터 카멘친트를 추천받았고 다음날 난 그걸 빌려 읽는다. 책은 <데미안>과 구조상으로 아주 비슷한데, 유년에서 시작해서 청년 시절의 방황과 철학적 멘토가 되는 또래가 있다는 점, 이 책에서는 2차세계대전이 시작되진 않지만 그것의 프로토타입이라고 할 만하다.

 

한 해 동안 쓴 다이어리가 어느새 이렇게 두꺼워졌음

 

<바람이 불 때에>는 예전부터 궁금했던 그림책인데 딱히 사읽진 않다가 최근에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배송을 시키면서 2만원을 넘기려고 끼워샀다. 사실 그림책이라기엔 이 책이야말로 그래픽노블에 가까운데, 각주가 아주 많이 달렸고 전쟁사에 대한 언급이 많다. 핵폭발을 맞이하는 은퇴한 시골 노부부 이야기. 무척 현실적이고 잔인한 한편으로 따뜻하다. 읽고 나서야 알았다. 레이먼드 브리그스가 <눈사람 아저씨>를 쓰고 그린 그 작가였다. 세상에 그는 어린 시절 내 영웅 중 하나였다. 나는 성숙해졌고 이런 이야기를 읽을 때가 됐다. 우리는 이렇게 재회한 것이다.

 

"날 구해줬군요. 하지만 왜죠? 어차피 우린 다 죽을 거예요." "할 수 있는 데까지 싸워야죠. 그래야만 살 수 있는 거예요. ... 그래야 내 안의 내가 살 수 있는 거예요."
'하나부터 열까지 영웅이라...'

<크라이시스 온 인피닛 어스>. 사실 크라이시스 이벤트에서 메타휴먼이 아닌 사람들은 할 수 있는 게 없고, 바바라의 고뇌가 보여주듯 위기 앞에 무력한 인간은 우리와 지극히 똑같다. 이제 우리의 영웅은 무슨 말을 할까? "우린 용기를 나눌 수 있어. 그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 (팝콘이나 가져와라 로빈 이라는 패러디로 유명한 그 패널.)

이 슈퍼걸 이야기는 말도 안되게 좋군. 캐릭터를 죽인다면 확실히 재밌을 수밖에 없다(물론 이런 크라이시스의 재미 보장성과 인기 요인은 댄 디디오 편집장 같은 괴물을 만든다). 서문에서 밝히기를 울프만은 슈퍼맨으로 하여금 마지막 크립톤인이라는 정체성을 강조하고 싶었다는데, 나중에서 모리슨은 그런 시도가 싫었다면서 전부 되살려서 쓴게 재밌다.
그래도 사실 어떤 죽음은 모욕적인 한편 여기서는 애정을 갖고 죽인게 느껴진다.

역대 플래시들이 나와 세대교체하는-이런 이야기들은 언제봐도 감동이다. 마치 톰크루즈가 오로지 달리는 장면만으로 영화 팬에게 눈물을 흘리게 할 수 있듯이 플래시의 다리만 움직여도 뭉클하다. 이제 완전히 시간과 차원선을 넘나드는 상징이 된 그 헤르메스 같은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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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 아워>는 <크라이시스 온 인피닛 어스>의 사족처럼 느껴지지만, 이 시기의 히어로들-카일 레이너와 코너 켄트, 바트 앨런을 본 것만으로 만족스럽다. 그린 애로우가 할 조던에 대해 회고하는 결말도 꽤 감동적이다(그들의 우정이 그렇게 끈끈한 줄 몰랐는데, 후일 <아이덴티티 크라이시스>에서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그 작품의 내레이터이자 사건의 한 축을 이끌어가는 자가 바로 다름아닌 올리다). 그나저나 국내 정발본 표지가 엄청난 스포일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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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투 킬> 배트맨과 로빈의 감독으로 내겐 왠지 좋은 영화를 만드는 양반으로는 보이지 않던 조엘 슈마허지만, 이상하게 세기말의 대작은 대부분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다. 매튜 맥커너히와 산드라 블록 그리고 애슐리 주드의 눈부신 리즈시절이 담긴 이 영화는, 자신의 딸 아이를 강간한 남자 둘을 총으로 쏴 죽인 흑인(사무엘 잭슨 분)의 무죄 공판을 다루는 법정 드라마다. 아버지 자경단의 살인이 문제가 되기보다는 그의 인종에 포커스 맞춰져 있다. 심지어 이 법정을 둘러싸고 KKK단의 테러까지 동원된다. 변호사의 최종변론이 주는 임팩트로 마무리되는 전형적인 할리우드 영화. 주말에 어머니와 텔레비전 앞에 앉아 보았다.

 

"코스튬을 입는 사람은 누구나 제 가족의 가슴에 과녁판을 그려 넣는 거나 마찬가지야."
"거물들 머릿속엔 다음 전투밖에 없었어. 뒤처리라는 게 뭔지 아는 놈들이 없어. 그리고 뒤처리 문제는 언제나 있어." "우리가 한 거야. 그 긴 세월 동안… 모두 우연이 아니었어. … 우리가 그렇게 만든 거야. 그래서 속이 다 시원했어."
"잘 자." … "나도 사랑해."

조연으로 시작해서 조연으로 끝나는 이야기. 지면에서 다뤄지지 않은 공백에 관한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롭고, 이 책은 거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미시적인 이야기이다. 우리는 영웅을 멀리서 올려다 보는 것이 아니라 현미경으로 관찰하게 된다. 그들을 영웅이기 전에 인간으로 본다면, 그들을 존경할 만한 부분보다는 약하고 개인적인(개인적이라는 것은 곧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부분에 집중하게 된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나쁘고 악마적이다. 나쁜 책이라서 좋은 책이다. 신화는 좋다. 하지만 취약함, 자기고백, 속죄는 더 좋다. 누가 이 거대하고 자본적이고 희망적인 인물들을 가지고 이렇게 개인적인 고백을 하는 데에 쓸 수 있을까? 한 사안의 해결 방법에 대해 영웅들이 대립한다는 데서 <왓치맨>과 비슷하고, 마블의 <시빌 워>와도 비슷하지만(실제로 아덴크가 시빌워에 영향을 줬다), 이 고민이 그것보다 사적이다. 정말 이렇게 추리소설답게 재밌으면서 동시에 영웅과 가면성에 대한 통찰이라니.

병원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모두 중환자를 보면서 내가(혹은 내 가족이) 저만큼은 아니라서 다행이야, 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건 환자나 간병인 모임에서도 모두 생각하면서 함묵하는 비밀처럼 다뤄진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결말에 이르러 어느 나레이션을 보면서도 그걸 떠올렸다.

이반뇌제와 그의 아들을 연상시키는 유명한 패널. "배트맨과 로빈. 고아들." 사실 만화 전반을 걸쳐 시점 전환마다 인물 혹은 관계를 간단히 일축하는 설명이 있는데, 그것의 반복적 효과를 극대화화하는 건조하게 잔인한 서술. 정발본은 감독판이라 끝에 라이터와 펜슬러가 컷을 두고 대담한 것과 시나리오가 수록되어 있다. 글쓰기와 연출에 대해서 정말 많은 공부가 되고, 책도 더욱 풍부하게 즐길 수 있다.

새삼 픽션만이 나를 이렇게 가슴뛰게 할 수 있네! 마치 백년의 고독에서 돼지꼬리처럼, 브레이킹 배드에서 은방울꽃처럼, 스파이와 배신자의 "영어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아이덴티티 크라이시스의 "홀아비"와 "고아들"이 이제 자리한다.

 

아침에 토익을 보고 점심으로 우동을 먹었다(성심당 우동야). 평소에 영어공부를 할 땐 리스닝이 수월한 반면(난 하루종일 영미권 콘텐츠를 보곤 했으니까), 리딩은 난독증 때문에 어려웠는데 막상 현장에 가니 달랐다. 천장에 붙은 스피커에서 음성이 흘러나오는데 내 머릿속은 딴생각을 해서 블러처리한 것처럼 들리지 않았고, 그런 반면에 리딩 파트는 마치 슬로우 비디오 증후군에 걸린 것처럼 글이 시각적으로 너무 빨리 읽혀 금세 풀었다. 시간이 모자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어쨌든 처음으로(드디어, 처음으로) 본 시험이니 차차 더 잘할 수 있겠지. 어차피 토익은 계속 보는 거니까.

새벽에 아덴크를 읽고 밤을 새운 뒤에 생리가 시작돼 진통제를 먹고 간 시험이었던 걸 감안하자. 낮 내내는 잠을 잤고, 일요일의 마지막 의식으로 버스 터미널에 가서는 또 책거래를 했다. 맙소사 우리는 세번째였다 그것도 정체를 모르고 세번이나 만날 뻔했다. 그러니까 난 이 동네가 좋고 여길 고향이라 여긴다. 졸업하고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다시 엄마의 집에 살아도 될까?

그래. 아마도. 내가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이라니. 그게 얼마나 위안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