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난새
The gates to paradise are locked. It became private property. But we can go round the back and hop the fence.
공터가 되는 것
2025.08.20

머릿속이 이러쿵저러쿵 말 많은 전쟁터가 되는 것은 우려할 바가 아니다. 공터가 되는 것을 우려해야 한다.
(나오미 클라인, 도플갱어)

 
뜬금 없는 카톡으로 수지씨가 대전으로 이사오겠다고 했다. 원래 우리 모임은 집들이가 아니었는데 집들이가 되었고 구성원이 바뀌어 세명으로 줄었다. <대전 사람 수부씨>는 그 근처의 찻집이었는데 워낙 유명한 가게인지라 외지인이 올때마다 염두에 두는 곳이었다. 여름철에만 한다는 복숭아 특급 애프터눈 티세트는 구미당기는 선택지였다. 광천식당은 두부두루치기를 먹이려고 간 것이었는데, 가는 길에 택시기사가 오징어를 먹으라고 신신당부하는 바람에 오징어두루치기를 시켜버렸다. 거기엔 두부가 없었다.

우리는 집이나 로봇 청소기나 돈벌이 따위의 세속적인 대화를 하다가도 창작론이나 배우고 싶은 것이나 좋아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섞어 이야기한다. 세시 무렵에 만나 별 것 하지 않고 하루종일 떠들었으면서도 침대에 누워 대화를 나누다보니 동이 트고 여덟시가 된다. 이들이 내 글을 높이 사 주는 것이 언제나 고맙다.

헤어질 무렵에는 원도심의 다다르다에 들러 몇 권씩 책을 샀다. 예전에 그 서점은 <도시여행자>라는 이름이었는데(은행 소비처에 찍힌 이름을 보고 알았다), 이제 그것은 브랜드 혹은 기획의 이름으로 남고 서점은 완전히 새옷을 입었다. 직원이 자기가 읽으며 메모한 책을 서가에 비치하는 큐레이션과 일기나 발췌를 영수증에 길게 인쇄하는 등의 마케팅 전략은 관광지가 된 대전 원도심과 맞물려 많은 애서가를 끌어들였다.

우린 고른 책을 다음에 만날 때 교환해서 읽기로 했으므로 내 몫인 <사나운 애착>에 몇가지 메모를 해두었다. <미국 공산주의라는 로맨스>를 감명깊게 읽고 고르게 된 비비언 고닉인데 그것에 비하면 실망스러웠다. 사나운 애착은 어머니에 대해 쓴 에세이고 백델의 <당신 엄마 맞아?>를 연상케 한다. 가족에 대한 진솔한 고백을 읽을 때면 깨닫는데, 나는 가족들을 사무적이게 바라보고 그들을 상사처럼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저술가들이 너무 생생하게 쓰고 때론 과장하는 애증에는 공감할 수 없어진 것 같다. 이제 내가 자녀의 위치보다 부모의 위치에 공감할 만큼 나이를 먹었을지 모른다. 혹은 내가 운이 좋아서 좋은 상사를 만났는지도 모른다. 최근에 아빠가 전화해서 딱 <잘 지냈냐, 뭐하냐, 잘 지내라> 세 마디를 하고 끊었는데, 난 그가 사랑보다 책임감으로서 날 대한다고 항상 생각해왔지만, 그런 어색한 순간마다 사랑이 노력으로 수행된다는 것도 잊지 않는다.


고등학교 동창들과 가는 매년 여름의 휴가. 오랜만에 보는 바다였고 오랜만에 즐긴 해수욕이다. 민하는 어엿한 드라이버가 되어서 우리를 태워 서해로 나른다. 본래 여덟명이었던 우리는 만나는 날마다 인원이 늘었다가 줄었다가 하다가 이번엔 네 명이다. 오래 얼굴을 보지 못하는 친구에 대해 서운함을 토로하고 과거를 회상하다가 세벽 네 시가 됐다. 이상한 건 그때가 전혀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 살다가도 만나기만 하면 와, 내가 걔를 기억한다니, 하면서 떠들 수 있게 된다. 어긋난 조각과 숨겼던 것을 털어놓으면서 기억은 다시 짜맞춰지고 다시 고등학생이 된 것 같다. 수학여행에 가서 떠드느라 밤을 새우는 고등학생.

 
<슈퍼맨>이 개봉한 이래로 최근 내가 DC 코믹스를 다시 읽고 있다는 것과 영화를 덜 보게 되고 책을 더 읽게 된 것은 상관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근무지에서 개인 랩탑을 쓰지 못하게 되면서 자격증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는 내가 도피처로 책에 손을 댄 것일 수도 있고. 최근의 나는 거의 이식증적인 도구로서 책을 읽는다.

근무 초반에 잡일 뿐이고 한가롭다고 말했지만 이후는 좋지 않았다. 담당 사수는 별 꼬투리를 잡아 내게 한마디 하는 것에 재미를 들린 듯했고, 다른 학생들에게 용인해주는 것을 내게는 박하게 굴었다. 그는 달에 한 번 하는 일을 내게 주에 한 번 시켰는데 그게 단순히 그가 까먹어서인지 혹은 내가 편하게 앉아 있는 꼴이 보기 싫어서인지 모르겠다. 자기 업무를 내게 떠넘기는 게 바쁜 사람이니 근로자를 써먹는 것인지 혹은 태만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의 실수로 한 번이면 다녀올 수 있는 일을 서너번씩 가야했던 것에 나는 내막을 알면서도 불평하지 않아야 했다. 다른 남학생에게는 햇볕이 뜨거우니까 쓰고 가라고 양산을 빌려주는 친절함을 발휘하는 사람이 내게는 사소하게 몇 번씩이나 외근을 시킨다. 그리고 이 모든 짓들을 받아적고 불평하는 내가 역겨운 짓을 하는 것도 같다. 굳이 언어화하며 씹을 가치가 없다. 주변 사람들이 거지 같다면 나한테 문제가 있을 확률이 높다. 악마는 지옥에서 사는 거고 여긴 나한테 수준이 딱 맞다.

그만 징징대고, 그만 말하고, 그만 바쁜 척, 속상한 척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사무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 눈꺼풀을 뒤집어 전두엽을 긁어놓는 로보토미 수술을 받듯이 살찐 자아를 죽이고 내면을 숨기고 싶다. 그러나 이런 말을 했을 때 수지씨가 말하길-"이미 그렇게 생각하는 시점에서 자아가 큰 것"이다. 그녀는 사람들이 영화에 대해서 시끄럽게 떠들듯이 책에 대해서도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읽은 것을 얘기하려고 한다.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를 읽는데 행정실 직원 중 하나가 <목화밭의 고속도로에서>라고 개그를 시도했다. 나는 그가 잘못 읽은 줄 알고 정정해주려고 했으나 "알아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 책은 표제작보다 <숲에 이르기 직전의 밤>이 더 인상적이다. 그 일인극을 예전에 드니 라방이 공연한 적이 있다고 원오에게 말해줬는데, 원오는 그 영상 소스를 찾아 인터넷을 뒤지다가 급기야 내년 상반기에 드니 라방이 주연하는 파리 공연 <고도를 기다리며>를 예매했다.

<도플갱어>는 나오미 클라인이 나오미 울프(<무엇이 아름다움을 강요하는가>의 저자이며 현재에 이르러는 우파 루머를 확산하며 정치권의 마이크를 쥐고 있다)로 오인당한 것에서 시작한다. 이 촌극같은 현실은 아이디어의 단초가 되어 나오미 클라인은 자서전을 쓰는 동시에 현재의 우경화 미국을 아우르며 솔직하게 감상한다. 에필로그에서 클라인은 대학 시절 울프를 만나 여성 저술가로서 그녀가 모델이 되었음을 고백한다. 우파적인 백인 여성으로서 한계가 뚜렷한 페미니즘 작문을 했으나, 막상 연단에서 만났을 때 가죽 자켓을 입은 채 털털하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은 저술가를 꿈꾸는 어린 여학생들에게 고무적이었다. 한때 그 여자는 유대인으로서 드물게도 팔레스타인의 편에 서서 이스라엘의 학살을 거의 유일하게도 반대해 공격을 받았는데(도플갱어는 23년 이스라엘-하마스전을 직전을 앞두고 출간됐다.), 지금은 앨 고어에게 알파메일처럼 행동하라고 하면서 백신 루머를 퍼뜨린다. 울프가 복잡하고 한편으로 안타까우며 증오스러운 사람인 만큼 에필로그는 영화적인 한 장면으로 읽힌다. 감동적인 좌파도서.

<지각의 정지>의 제목이 말하는 바는 주의 집중 혹은 몰입이다. 중세 농경사회에는 없었으며 산업혁명 이후 근대에서 만들어진 개념이라고 지각의 정지를 설명하면서 ADD등을 예시하는 초반이 있으나 책은 기본적으로 예술서적이며 그같은 지각모델이 회화와 영화(특히 초기 영화, 암상자에서 사진을 연달아 보는 것 따위의)와 같은 시각예술에서 어떻게 쓰였는지를 탐구한다. 쇠라의 그림들이 꽤 많이 나왔는데, 이전까지 난 점묘법에 대해서는 점이나 찍는 인간들이라고 생각했으나 여기서는 '색채의 분리주의'라고 묘사되고, 인식 실험으로 다시보고 난 후 그의 그림들은 훌륭하다.

<모든 것은 영원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은 소비에트의 붕괴를 둘러싸고 그 파멸이 전혀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사건이었음에도 사람들은 마치 예상했던 것처럼 붕괴를 받아들였다는 데에서 시작한다. 국가와 그바깥에서의 관료주의와 수사학, 체제를 보일러실이나 레코드(표지가 그렇다)에 비유한 것, 콤스몰에 속한 청년 세대의 문화사 등 사회주의 후기의 풍경을 서술했다.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청년 세대가 라디오와 록 밴드 음악 따위로 자본주의를 접함을 통해 (그들은 마치 생산자처럼 부모 세대를 착취하는 한량으로 풍자되었지만) 오히려 자신들만의 공산주의적 가치를 확립했다는 부분은 재밌게 읽혔는데, 다소 도드라질정도로 길고 현장감있게 기술되었다. 그런데 후에 밝혀지기를 저자야말로 라디오사에서 근무하였으며 록밴드의 일원이었다는 것이다.

이후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연달아 읽기로 했는데, 마침 반납하고 보니 도서관의 반납 서가에 바로 꽂혀 있었다. 운명적이다. 마크 피셔는 출간 당시 K-펑크를 몇꼭지 읽다가 말았는데, 쉽고 재밌게 잘 쓰였다. 우울증에 걸린 청년들이 이토록 많다면, 자본주의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는 병폐를 개인화/병리화하며 눈가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논의가 피셔로부터 출발했음을 알았다. <도플갱어>를 읽을 때도 느꼈지만 요 근래의 사회 도서에서 쓰인 대중문화 레퍼런스는 전부 내가 아는 것들이라는 게 새삼 신기하다. 이를테면 그 책에는 윤석열의 당선과 홍보정책이 언급되어 있다. 저술과 출간과 번역이 한꺼번에 이루어져 내가 독서하는 데까지 이렇게 빠르게 도달하는 일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특히 영미권 문화를 향유하므로 영미권의 저술을 읽었을 때, 그 익숙한 책, 영화, TV, 음반, 뉴스와 저명인사들에 반가워하게 되는 일 말이다. 동시대에 쓰인 동시대에 관한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