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난새
The gates to paradise are locked. It became private property. But we can go round the back and hop the fence.
IT'S ABOUT ACTION
2025.11.23

졸전을 보러 온 다운씨와 오랜만에 청주에서 만났다. 그날은 내 강의도 일찍 끝나 오후 서너시부터 점심을 먹고 카페에서 죽치다가 노래방도 갔다가 세시간 하는 영화까지 본다. 우리는 삼년 전에 여기서 자주 만났던 추억을 되새긴다. "좋은 시절이었죠. 그땐 그게 좋은 줄도 몰랐는데" 마치 이상은의 언젠가는 가사 같은 말이 나온다. 노래방에서 애니메이션 주제가 같은 걸 부르는데, 세상에 십년 혹은 십오년 전에나 듣던 노래를 아직도 이렇게 잘 부를 수 있다니.

 

<국보> 영화는 패왕별희를 연상할 수밖에 없는데(그건 경극이고 이건 가부키, 어쨌든 전통극에서 여성 배역을 연기하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 '온나가타'라는 소재), 문화대혁명을 겪으며 폐허가 된 중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현대에까지 이르러 국보가 된다는 이야기. 그 과정에서 캐릭터는 오로지 무대에서 연기함에만 정신을 쏟고 주변의 풍경은 뒷전으로 한다. "당신을 내 아버지라고 생각한 적 없고 당신은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이에요. 하지만 당신은 최고의 연기자군요"라고 인정하는 희생된 가족들. 영화는 선형적으로 흐르지만 관객에게 보여지는 시간은 분절적이다. 마치 노인이 자신의 일대기를 회고하는 것처럼.

 

블랙 프라이데이를 맞아 책을 몇권 주문했기 때문에 자리를 만들기 위해 책장을 또 정리했다. 주에 한권 이상은 구매하다보니 주말마다 이짓을 하게 된다. 일본 만화 칸은 죽으려고 하는 게 눈이 보이고. 소설 포함 일반도서 단행본은 대부분 거실 책장에 꽂아두었는데 역시 저런 식이다. 세운 책 위에 눕히고 책장 정리라기보다는 테트리스에 가까운 행렬.

 

Countdown to Infinite Crisis - The OMAC Project - Sacrifice - Villains United - JLA Crisis of Conscience 이 여정을 달린 뒤 드디어 <인피닛 크라이시스>를 읽었다. 본편만큼이나 이전의 미니 시리즈들이 재밌었다. 특히 부스터 골드와 블루 비틀의 이야기.

"당신 지구의 딕이 내 지구의 딕보다 나은 거요?" … "아니."
"완벽한 세계엔 슈퍼맨이 필요 없지."
"It's about what you do…" "…It's about action."

주제면에서는 킹덤 컴하고도 비슷한데, 마크 웨이드랑 알렉스 로스가 이미지 코믹스의 출현과 함께 타락한 90년대 DC에 대한 일종의 회한을 그려냈기 때문에. 다만 그것은 창작자로서 신화적인 인물들로 쓰겠다는 다짐이고, 그런 동시에 인간 곁에 있어야 된다는 모티브(데일리 플래닛 다이너로 대표된)를 담아낸다.

반면 인피닛 크라이시스에서는? 제프 존스가 사람들은 나이트폴을 잊지 않는다고 밝혔듯, 제이슨이 죽고 배트맨이 베인한테 허리 부러진건 모두가 기억하는 역사다. 앨런 무어는 애들 보는 만화를 이 지경으로 만든 이 짓거리를 끝내자고 하고, 우리(독자)도 정말 슈퍼맨과 저스티스와 골든 에이지를 그리워하는데(심지어 잘못 쓰인 캐릭터들을 한심해하고 내가 해도 더 낫겠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크라이시스로 초기화하고 리부트한다고 해서 없던 일이 되나? 그 세계가 과연 더 나은 세계가 되나?

인피닛 크라이시스는 정말이지 제프 존스--한때 팬보이였던 작가가 쓴 책이고 독자로서 역사를 총망라한 것이다. 당신들이 해왔던 모든 한심한 것들이--다른 말로 하자면 당신들이 써왔던 모든 한심한 이야기들이 정사라고. 개중에는 좋은 것들도 있었고 나는 그 모든 것을 보면서 자라왔다고 말이다. (이후에 모리슨이 쓴 배트맨을 생각해보면 더 세련된 방식으로 과거의 유산을 오마주할 수도 있다는 걸 알 수 있지만. 이 이벤트가 더 이전이었으며 또 이 투박한 애정 만큼은.)

 

아주 멋진 그린 링 젤리 사진

크라이시스와 병렬적으로 그린 랜턴 시리즈를 읽고 있고, 오늘로써 <시네스트로 군단의 역습>을 끝냈다. 기대를 많이 걸었는데, 어쩌면 난 스케일에서 재미를 보는 타입보단 미시적이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필요한 것 같다. 내주 주말에는 이태원 그래픽에 가서 블랙키스트 나이트 시리즈를 읽을 생각이다. 결국 <52>와 <파이널 크라이시스>는 읽지 못하고 가는군.

내년엔 졸업하지만, 가능하다면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기숙사에 살고 싶어서 동기와 함께 입사 신청을 하려고 한다. 요 근래 매일같이 도서관에 함께 가곤 하는 그도 나처럼 복수전공생이라 마지막 학기까지 취업하지 않았고, 우리는 둘 다 취업전선에 바로 뛰어들기보다는 시험에 매달려보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이렇게 마라톤하듯 코믹스를 읽고 쳐야하는 마감에 맞춰 글을 쓴다. 어쨌든 불안이 있을지언정 자기혐오와 싸우진 않는다. 내 체념, 사람들은 그게 나쁜 개념인 줄 알지만 누군가에겐 구원이라는 것, 나는 일종의 히피이고 멋진 하루를 꾸리는 게 멋진 인생으로 확산하리라고 자위한다. These are crazy days but they make me shine... Time keeps rolling 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