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올리브 나무 사이로>와 <체리 향기>를 보았다. 둘 다 마지막의 긴 시퀀스가 인상적인데, 황금종려상을 받았다는 체리 향기 쪽이 더 묵직하게 와닿는다. 자신을 땅 속에 묻어 죽여달라고 부탁하며 히치하이커를 태우는 남자. 그는 말단 군인과 신학생을 거쳐 어느 박제사 노인에 이르러 체리 한 알에 관해 이야기를 듣는다. 그가 비와 천둥 속에서 눈을 감았을 때 보이는 눈꺼풀. 그 조용한 어둠. 마지막에 다소 어색하게 삽입된 메이킹 필름은 마치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그렇게 눈을 감는 것으로 끝나는 영화가 또 있었는데. 아마도 Cerrar los ojos.


주말 저녁 늦게 원오의 집에 찾아간다. 어김없이 그의 집 고양이는 낯선 나를 무척 좋아해서 꼬리를 흔든다. 다음날 아침엔 혜화에서 이태원으로 간다.




원래는 경연을 만나려고 했는데 전날 밤 너무 늦게 잠든 그는 뒤늦게 경기에서부터 출발하기 너무 고되었나 보다. 단둘이서 사라바나 바반에 갔다. 도사라고 하는 빵과 콜리 플라워 튀김을 먹었고 아주 매운 카레들. 향신료가 들어간 카레에 익숙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는데 이번주의 컨디션은 영 아니었는지 매운 음식을먹기가 너무 힘들었다. 다행히 원오는 예상했듯 너무 좋아했고 "근데 내가 인도 음식을 좋아해" 그가 말하면 내가 "알아 씨발"이라고 답한다.




일부러 평일에 시간을 내어 이태원을 향한 것은 그래픽에 가기 위해서였다. 여긴 정말 한국어 정발본은 다 있었고 난 블랙키스트 나이트 세권을 읽기로 목표한다. 세 책을 이슈마다 번갈아 읽으면서, 그리고 삼십여 분간 졸면서. 그린 랜턴 다섯 권을 읽은 다음에, 수어사이드 스쿼드 배드블러드와 할린을 읽었고, 폴 디니와 알렉스 로스의 월드 그레이티스트 히어로즈 시리즈까지 본다. 원오는 그동안 하비비(나의 추천작이었으나 정작 나는 읽지 못했다), 나우시카, 피의 흔적을 보았다. 우린 한 시가 조금 넘어서 도착했는데 나갈 때는 열 시였다. 내려갈 땐 이태원 골목을 밤나들이하듯 걸어서 녹사평역에서 전철을 탔다.
블랙키스트 나이트에 대해서: 블랙 랜턴이 좀비 같은 거였다니. 스케일은 오히려 시네스트로 군단의 역습이 더 큰 것 같고, 오히려 이 이야기는 과거의 죽은 인물들을 애도함과 동시에 되살리는 것이기도 하다. 본편이 가장 화려하고 작화도 멋있지만 토마시의 군단 이야기도 좋았는데, 시네스트로와 소라닉 나투의 관계는 마치 다스베이더와 루크 스카이워커 같고, 소담 야트의 희생, 카일 레이너와 가이 가드너의 의외의 우정이 마음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월드 그레이스트 히어로즈 시리즈의 좋은 점은 물론 첫째로 알렉스 로스의 경외감 드는, 장엄한 작화고, 나머지는 이들이 "하늘 높이에서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세계의 낮은 곳에서 활동하는 모습 때문이다. 원더우먼이 히잡을 두른 여자들 사이에 숨어있다가 그녀의 수영복 같은 코스튬을 드러내거나, 빌리 뱃슨이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이웃집 아저씨의 문을 두드린다거나.




약속 날짜가 이번주말이 된 건 순전히 영상자료원에서 토요일에 <백색 공포>를 상영했기 때문이다. 원제 Panic in the Needle Park인 이 영화는 어린 시절의 알 파치노가 주연했으므로 나름 우리의 위시 리스트에 있었기 때문이다. 영자원에서는 사랑과 중독이라는 테마로서 <크리스티아네 F: 우리는 초역의 아이들>이라는 영화를 연달아 상영했는데 그것도 함께 보았다. 그건 또 데이빗 보위가 나온다는 이유로 골랐지만 막상 보니 보위는 배역이 없었고 정말로 보위였다. 등장인물들이 보위 팬이었다. 두 영화는 약쟁이 남자에게 사랑에 빠져서 약을 시작했다가 몸을 팔게 되고 파멸하는 여자들이라는 스토리 라인을 공유하는데, 사실 백색공포는 마약에 대한 위기감을 주는 영화는 아니었고, 크리스티아네 F는 슬펐다(그들은 너무 어린 아이들이었고 약을 주고 몸을 사는 행인은 어른들이었다. 그리고 금단증상을 견뎌내는 그 지옥도).
마침 영상자료원에서는 디깅 사운드트랙 전시를 하고 있어서 이 수많은 피지컬 앨범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이런 데에 오면 사실 아는 척하는 재미밖에 없지만. (한국) 영화의 역사에 대한 상설 전시도 돌아다니는 재미가 있었고. 언제나 KOFA 상영관만 갔던 나였으니


화곡동 니코니코 라멘. 이건 우리가 저녁은 뭐 먹고 헤어질까 하다가 나온 아이디어로 우리 중엔 라멘 마니아가 있기도 했거니와 '여왕의 먹이' 만화에 출연한 식당이기도 하다(일종의 성지순례). 이날이 아니면 영영 여기에 들를 수 없을 것 같기도 했다. 너무 맛있는 매운 돈코츠 국물과(난 장을 반이나 덜어놓고 먹었다) 탱글탱글한 차슈와 달걀

길가다가 니들 파크에서의 중독자들 흉내내잡시고 컨셉샷 찍음. 왼쪽분 다리가 너무 기네요




지영 씨를 만났고 그녀가 맞기 전에 우리는 화곡에서 혜화로 막 온 참이었다. 그게 20시쯤이었는데 그녀는 21시 20분 무렵에 왔고 집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기 (정확히는 신발을 신고 벗기가) 귀찮았던 우리는 길가에서 시간을 때웠다. 집 앞이지만 평생 먹지 가지 않을 것 같은 카페에 간다든가 무인 가챠샵 따윌 본다거나 거리에서 라이브 콘서트하는 아마추어 가수들한테 "내가 불러도 이거보단 잘 부르겠다"고 비아냥하거나 공원 놀이터의 나무 도막을 타고 오르고 뭐 그런 식으로.
아무튼 우린 고스트 마라찌라는 상품을 먹고(마라샹궈인데 닭이 들어간 음식으로 네이버 스토어에서 파는데 배송이 12일 걸렸다) 두부게이 음료를 마시고 대화한다. 새벽 세시까지 대화한다. 잠이 오지 않을 것 같다고 멜라토닌 구미를 두 개 도핑해놓고 한 시간을 더 누워 이야기하다가 잠든다. 코믹스 캐릭터 얘기를 하다가 게임 얘기를 하다가 서로 누워서 근육 풀어준답시고 마사지도 하다가. 원오는 사소한 자기 얘기는 꽤 많이 하고 언제나 주제를 자기쪽으로 전환해버리곤 하면서도(그런 게 매력일 것이다), 사실 게임을 한다든가 덕질을 한다든가에 대해서는 부끄러움을 갖고 의외로 삼가는데 이날 보니 원오가 얼마나 게임에 미쳐 살았는지 알겠다. 그리고 그는 나와 달리 거기서 인생을 살고 감정을 소비할 줄 아는 사람인 것이다. 타고난 이야기꾼이기도 하다




다음 날 아침에 난 너무 늦게 일어났고 우린 한 시가 넘어서야 점심을 먹는다. 그리고 장한평에 가서 소기의 목적이었던 다이스 라떼에 간다(전주부터 미안하다곤 했지만 원오는 거의 나에 의해 한 주말을 끌려다녔다. 물론 좋게 말하자면 우린 공통의 친구를 만나고 난 거의 파티 플래너로서 수행하고 있었다). 다다음주에 연다는 행사 서울 코믹 위크에 대한 예비 탐사로서 트래비스 무어의 커버도 사고 나의 프리오더 주문을 픽업하기 위해서. 전자상거래에서는 한달씩 고민하고 사지만 이런 가게에 오면 마치 마이클 잭슨처럼 여기부터 여기까지 다 주세요 라고 말하게 된다. 단행본도 있는 고담 센트럴을 몇 권 샀다(제일 좋아하는 이슈가 포함됐다는 이유로. 그 표지를 좋아하니까). 빅 이벤트인 DC KO와 나이트 파이트. used book이지만 원더우먼 gods of the gotham도 샀고(필 히메네즈의 그림을 좋아해서), 앱솔루트 배트맨의 볼륨 1(이게 벌써 나왔구나)과 쌩뚱맞게도 맥스웰 로드에 대해 엮은 책을 샀다. countdown to infinite crisis를 보면서 테드 코드와 부스터 골드에 빠진데다가 덕분에 요근래는 키스 기펜의 JLI를 읽고 있기 때문에. 그 책이 그것들과 sacrifice에서 원더우먼이 맥스웰 로드를 죽이는 장면 등을 엮어놓았다. 어쨌든 실물로 갖고 있을 만한 나쁘고 좋아하는 패널들이라서(죽는 장면들이 좋아하는 장면들이라고? 그렇다)
KO의 폴리백 커버를 사가는 사람은 많았어도 매장 안에서 뜯어보는 사람들은 우리가 처음이라며 사장님이 구경하셨다. 지영씨가 코믹위크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기 때문에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눴다(친절하셨다).
장한평에서 우리는 헤어졌다. 난 원오의 집에 손목시계와 티셔츠와 속옷을 두고 나왔다. 돌아오는 길에는 어김없이 옆자리 사람의 어깨에 머리를 기울이며 잠들었던 것 같다. 사과했지만 그는 이어폰을 끼고 있어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시내버스에서는 발을 밟혔는데 밟은 사람이 두리번거리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난 민폐를 끼치고 있고 또 폐를 입는다. 지영씨에게는 그녀가 좋아하는 영화 굿즈들을 가져다주었는데 그녀 역시 내게 선물을 주었다. 세상에는 총량이라는 게 있어서 잃는 만큼 얻는 것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무능에 대해서 비난할 수 없게 된 것은 내가 무능해진 이후였다. 왜 경험해 본 다음에야 연민할 줄 알게되지? 그러고 보니 원오가 <하비비>를 읽고 똑같은 얘기를 했다.
네이버 블로그 챌린지 때문에 쓴 문단: 스포츠 글감을 첨부하란다. 사실 난 열광적인 스포츠 팬이 되어본 적이 없다. 내 아버지는 프로야구가 개막하기 전에 고교야구부터 좋아했고 창단 때부터 엘쥐를 응원했다. 요근래 우승하고 코리안시즌에서도 왕좌를 지킨 이 구단에 아빠는 얼마나 설렜을까. 금요일에 그가 전화했는데 받지 못했다. 토요일에 건 전화를 받고 보니 왜 부재중 전화를 보고 콜백하지 않느냐며 꾸지람을 들었다. 노느라 정신이 없었다며 변명하는 나에게 그는 그게 아니라 그만큼의 애정 아니냐며 투정을 부렸다. 가벼운 장난이겠지만 자식된 도리로서 갑자기 사무치게 미안했다. 가끔 나도 소홀한 상대방에게 내가 그정도 우선순위라는 데에 너무 괴롭다. 하지만 내 아버지는 언제까지고 전혀 그러지 않을 냉혈한인 줄 알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