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만화를 애니로 먼저 보는 건 너무 많은 경험을 놓치는 일 같다. 배가본드도 아니고 리디북스에 전자책으로 떡하니 있는 만화를 돈이 없어서 넷플릭스 리메이크로 봤다는 건 한탄할 만하다.
10부작인 <데빌맨 크라이베이비>는 나가이 고의 <데빌맨>을 원작으로 한 넷플릭스 재패니메이션 시리즈이며, 유아사 마사아키가 감독한다. 마사아키는 <밤을 짧아 걸어 아가씨야> 등으로 상당히 저명한 감독이다. 작화는 재패니메이션 특유의 데포르메에서 벗어나며 명암이 없고 일관된 톤인데, 흡사 호소다 마모루 스타일이다. 마사아키는 줏대 있게 그의 스타일을 밀고 나간다. 나가이 고의 데빌맨보다도 선정성은 한층 더한다. 그 때문에 세련미는 커녕 어쩐지 더욱 유치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각색으로 인해 진행이 매끄러워진 부분도 있는 반면 오히려 일본 만화를 생각하면 으레 그렇듯 사춘기 남자애들을 위한 만화로 전락시킨 부분도 있다. 발정난 소년들을 위한 이렇게 멋진 이야기라니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감상과 유사하다. 물론, 선후를 생각하면 데빌맨이 먼저다.)
개인적으로 크라이베이비에서 호평할 만한 부분은 9화에 있다. 쿠로다 미키(미코)는 만화에 비해 훨씬 다층적인 인물이 됐다. 선정성을 위해 여성 캐릭터가 소모되는 반면에 이런 기적 같은 캐릭터도 있다. 그녀는 마키무라 미키를 미워하고 질투하면서도 동경하고 애정한다. 그리고 마키무라 미키를 살리기 위해 인간의 마음을 가진 데빌맨으로서 죽는다. 이때 마키무라 미키의 달리기는('나는 왜 달릴까? 앞을 보고 달리다 보면 나아가는 것 같아서…') 가히 감동적이며, 미코-미키-아키라로 이어지는 이어 달리기와 바톤 터치의 이미지도 설득력이 있다.
애니메이션이 좋고 나쁘고와는 별개로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감상 경험을 다를 수밖에 없다. 만화를 볼 때 독자는 시선을 주고 거두는 선택권을 갖는다(아무리 컷 크기를 통해 작가가 연출하는 바가 있다고 해도 그렇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에서는 감독이 제시하는 동화 프레임에 질질 끌려갈 수밖에 없다. 정형화된 작업 과정이 있으므로 작가 한 사람이 표현하고자 했던 아우라를 넘기도 힘들다.
극단적으로 비교하자면 이렇다. 아무리 나가이 고가 여자 가슴을 못그린다고 한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