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난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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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영화 리뷰
2023.11.04

 
작화 감독인 혼다 타케시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애니메이터였다. 마침 이 영화와 에반게리온 극장판의 마지막인 다카포는 작업 시기가 겹친다. 분노하는 안노 히데아키를 설득하면서까지 데려온 인재라고 한다. 혼다 또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기의 명작이 될지도 모르는 은퇴작을 맡고 싶었던 것 같다. 과연 영화의 애니메이팅은 유려하다.  초반부에서 불길을 헤쳐 엄마를 구하러 가는 길의 이글이글함이나, 나츠코를 만나러가자 종이가 새처럼 날라들 때는 말할 것도 없겠다. 그런데 어린 아이 보폭으로 높은 돌계단을 오르느라 무릎에 굽어지고 허벅지에 실리는 모양새나, 수많은 새-왜가리, 펠리컨, 앵무새-의 역동성은 감탄이 나온다. 무엇보다도 자잘한 조연 인물에마저 걸음 걸이 하나하나 캐릭터의 개성이 다 담겨있잖은가. 동화를 통해 말하고 있다.
 

 
왜가리의 부름을 외면하던 마히토는 실종된 나츠코를 찾기 위해 외가 저택 숲 한가운데의 탑을 향한다. 탑을 통해 지하세계로 내려가면, 환상의 세계가 펼쳐진다. 환상의 세계는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많은 망망대해다. 의문의 여자 어른의 안내를 받아 마히토는 섬을 향한다. 이 섬은 뵈클린 그림 속 죽은 자들의 섬과 같은 비주얼을 가졌는데, 이 세계의 비밀을 함축하고 있다. 말 그대로 정말 사후 세계 같은 것이, 이곳은 영혼의 보관소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죽은 자들의 섬이면서 태어날 자들의 섬이다. 명계이면서 산실이다. 나츠코를 구하러 간 마히토는 흡사 하데스의 명계에 에우리디케를 찾으러 간 오르페우스다.
 

 
와라와라와 펠리칸은 모노노케 히메를 연상케하는데, 인간의 시점에서 보는 자연은 하염없이 미화된 것임을 드러내며 자먹이사슬의 녹록치않음, 잔인함을 부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린 다들 굶주릴 수밖에 없어. 그래서 날아올랐지. 더 높이 날기 위해. 계속해서 날갯짓을 하기 위해. 새로 태어난 아이는 나는 법을 몰라."라는 대사는 원령 공주 산과 들개 모로 같기도 하고, 기성세대로서 노장이 현 세대에 전하는 메시지 같기도 하다. 하야오가 여전히 난쟁이 캐릭터를 그린다는게 좋다. 코주부고 못생기고 작고 우스꽝스러운 인물들이 좋다. 또 환상세계의 젊은 키리코는 모노노케의 에보시의 계보를 잇는, 장군 같은 여자 캐릭터다.

이 환상 세계에서 만나는 히미는 일견 히로인이지만, 실은 어머니의 영혼이라 또 추억의 마니가 떠오르지 않는가? 현실의 어머니는 불에 타 죽었는데, 환상 세계의 히미는 불을 쓰는 캐릭터라니 정말 묘한 지점이다. 그런데 현실 세계에서의 그 모든 일을 겪고 불에 타 죽을 걸 알면서도 히미는 이 세계를 벗어난다. 왜냐하면 마히토를 낳고 만날 것도 알기 때문이다. 이 경우는 최근의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와 닮아있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이 뒤틀려 아이러니컬한 수레바퀴를 건너고 인생의 회전목마 타는 구성은 하울의 움직이는 섬과 무척이나 비슷하다. 
 

 
이 환상 세계를 처음 발견하고 환상 세계 속으로 사라졌다는 큰할아버지는 거의 미야자키의 분신이다. 마히토도 자전성이 있는데(지브리 역사상 이렇게 분량많은 남자 캐릭터가 있었단 말인가? 물론 전형적인 지브리 인물로서 영민하고 영악하고 줏대있고 강하다), 큰할아버지는 아예 스크린 밖의 후손들에게 말을 건다. 자기가 만든 세계를 이을 것이냐고 묻는다. 이 세계가 아름다울지 추악할지는 네 몫이라고. 세계의 재료는 악의로 되어있지만 너는 그걸 알기 때문에 세계를 만들 수 있다고. 그리고 자기의 세계는 저물고 있다고.
 
노쇠한 거장이 은퇴와 죽음을 앞두고 후세를 걱정하는 외적 상황이 읽히기도 한다. 아들 고로의 미술관 건축과 실패작이 된 '게드 전기'를 둘러싼 일화를 생각하게 된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향방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나 거장은 다그치지 않는다. 그저 제시한다.
 
후손인 마히토는 자기 악의를 마주한채 현실 세계로 간다. 환상으로 도피하지 않고 밖으로 나와 마주한 세상은 새가 울며 풀이 흩날리고 흙이 발에 들러붙는 실제다.
 

 
개인적으로는 악몽을 꾸고 거실을 배회한 적이 있고, 엄마의 편지를 읽고 울어본 적이 있고, 책상에 앉아 나름대로 공작해 어른들의 물건을 만들어본 적이 있고, 집 밖에 나가 나름대로 멀고 모르는 곳을 모험해본 어린 시절의 기억이 새삼 다가오더라. 아 정말 영화에 나온대로 어린아이의 결정이 세계의 규칙 만큼 위대하고 소중하구나. 미야자키도 어린 시절의 기억과 순수함에 향수를 느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런 소중함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언제나 순수함을 가지고 그 시절을 여행할 수 있다. 어린이를 위한 영화를 만든 사람일 수가 있다.
 
군수업자 아버지나 양반집 규수인 어머니는 너무 부유한 나머지 시대와 불화하기도 한다. 형사취수제가 남아있는 시절인지도 의문이 든다. 식민 지배를 당했던 한국의 독자 입장으로서는 묘하지만 그가 전쟁을 반대한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안다. 다만 자신의 어린 시절에서 출발한 작품임을 상기한다.
 
그간 지브리 만화 영화에서 히사이시 조의 음악이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를 생각하면, 이번 영화는 굉장히 정적이었다. 마히토의 악몽 속 불길에서는 강렬했지만 이외에는 강물에 물수제비를 뜨듯 잔잔한 피아노 음계의 파문만 있을 뿐이다. 자연의 소리에 집중했다기에는 또 자연이 모노노케의 무시무시하고 생동력 넘치는 장소라기보다 환상적 공간에 불과하다. 스다 마사키의 왜가리 더빙은 놀라웠다. 아이묭은 그냥 아이묭이더라.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푸른 배경에 펼쳐지는 요네즈 켄시의 음악도 좋았다. 주제가라는 말에 정말 걸맞게도 가사가 인생의 방황과 모험을 함축하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 작품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가, 번복했다. 영화는 이제껏 그의 작업을 지켜본 이로서는 더욱 뭉클하다. 그의 작품 세계를 집약하면서도 자전적 색채가 묻어나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 후대에 대한 고민까지 드러난다. 덕분에 은퇴작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준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미야자키 하야오는 묻는다. 다만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잔소리를 하지 않고, 의문점을 남기는 데에 방점을 찍는다.
 
히미는 죽을 운명임에도 마히토를 낳기 위해 태어나길 택했다. 마히토는 아름다운 세계를 만드는 절대자가 될 수 있었지만 자신의 악의를 마주보았다. 전쟁이 일어나고 급우들에게 괴롭힘당하는 현실이지만 그곳에서 살아가기로 했다.
 
죽을 운명에도 태어날 것인가, 겉보기의 환상에 남을 것인가 악의의 현실로 돌아갈 것인가, 아름다움만 아니라 추악함도 마주할 것인가, 이토록 저무는 세계에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