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완 / 휘난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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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타곤 페이퍼, 워터게이트, 보스턴 카톨릭, 그리고 언론 영화
2023.09.12

8월 26일

Tom McCarthy, Spotlight(2015)

보스턴 글로브 사에 새로운 편집장이 부임한다. 그는 스포트라이트 부서가 카톨릭 사제의 성추행 사건을 취재하도록 지시한다. 처음 한 사제의 성추행 사건을 추기경마저도 묵인해준다는 것에서 출발해서, 이처럼 성폭력을 저지른 사제가 수도 없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카톨릭은 그들을 교구를 옮겨줘가며 옹호한다는, 이것이 보스턴 뿐만 아니라 전세계 단위의 일임을 스포트라이트 팀은 밝혀낸다. 영화는 수많은 좌절에 부딪치면서도 끈질기게 취재하는 스포트라이트 팀을 매끄럽고 긴장되게 연출한다. 마이클 키튼, 레이첼 맥아담스, 마크 러팔로 세 배우의 각각 냉소적이며, 진지하고, 온정적인 연기는 그들을 정말로 '있음직한' 기자처럼 보이게 한다. 영화는 끊임없는 인터뷰의 나열인데 화면을 메우는 것은 배우의 표정이고 사운드를 메우는 것 또한 인터뷰 음성이다. 피해자의 인터뷰가 나오더라도 쉽사리 플래쉬백을 쓰지 않는 강건한 선택은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자극적 회상 영상을 틀어주지 않는다. 대신 오로지 대사의 힘으로써 승부한다. "울더군요"와 같이 지극히도 담백하게 전하는데, 그것만으로도 꽤 많은 심정이 가늠간다. 신문의 골자를 읽는 듯한 진행이다.
 

 
피해자가 소송을 준비하면 에릭 매클리시라는 변호사가 사건을 맡는다. 그는 보스턴 카톨릭의 돈을 받는 변호사로서, 피해자로 하여금 카톨릭의 합의금을 제공받는 대신 소송을 취하하도록 설득한다. 어차피 재판을 진행하게 되더라도 카톨릭에서 입김을 불 것이고, 으레 피해자들이 종용받듯 소송은 길고 험난하며 돈이 많이 드는 전략이라고 말이다. 스포트라이트 팀은 에릭 매클리시와 마주치며 그를 악인으로 본다. 취재에 협조해주지 않는 매클리시에게 양심을 묻는다. 그런데 그는 심지어 보스턴 글로브에 합의를 받은 사제 목록을 보낸 적까지 있었다. 그런데 이보다 이전에 그것을 대수롭지 않은 기삿거리라 여겨 무시해버린 주체는 스포트라이트 팀장 로비(마이클 케인 분)이었다. 보스턴 글로브 내부 한 기자 또한 호소적이며 신경질적인 피해자 모임 일원을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했다. 그가 너무 분노했고 또 전국적인 범죄라는 것이 허무맹랑한 주장이라며.
처음 문제를 제기한 소송의 변호사 개러비디언은 이민자다. 처음 취재와 보도를 결정한 새 편집장 마티는 유대인이다. 그들은 보스턴에서 이방인이다. 개러비디언의 말에 따르면 보스턴은 "시민들이 아이가 성폭력 당하는 걸 보고만 있었다". 말하자면, 한 아이를 키우는 데에 한 마을이 필요하다면 한 아이를 성폭력하는 데에도 한 마을이 필요하다. 보스턴의 권력 집단이며 보스턴 시민들의 신앙이 집결되는 카톨릭을 무너뜨리는 것을 보스턴 시민들은 할 수 없다. 신뢰 사회를 나서서 망가뜨리는 일은 쉽지 않다. 보스턴과 무관한 이방인들만이 밖으로부터 문제를 바라볼 수 있었다.
 

우린 어둠 속에서 넘어지며 살아가요. 갑자기 불을 켜면 탓할 것들이 너무 많이 보이죠.
-영화
스포트라이트

 
 
 
8월 31일

Steven Spielberg, The Post(2017)

'스포트라이트'의 각본가 조지 싱어가 쓰고 '스티븐 스필버그'가 연출한 영화 더 포스트는, 펜타곤 페이퍼를 보도한 워싱턴 포스트를 다룬다. 펜타곤 페이퍼란 미합중국이 베트남에 직접적으로 개입했으며 이를 위해 전쟁을 개시했음을 기술한 보고서로, 정부 내 최고 기밀 문서였다. 당시 국방부 자문 위원이던 엘즈버그는 이 문서를 하나 하나 복사하여 언론에 유출했다. 뉴욕 타임스는 이것을 연재 기사로 싣기 시작했으나, 대법원에서는 뉴욕 타임스의 보도가 미국의 안보 이익에 치명적이라며 뉴욕 타임스에게 공표 금지 명령을 내렸다. 베트남전은 최고의 군대를 가졌다는 미국이 패배한 전쟁이다. 미국 시민은 이기지도 못하는 전쟁에 자신들의 아들을 보내야 함에 절망했다. 심지어 펜타곤 페이퍼는 미 국방부가 패배하리라 이미 알고 있었음을 시인한다. 시민들의 분노를 사지 않기 위한 법원의 조치는 독재 국가적인 발상이었다. 공표 금지 명령은 자유 국가 미국이 언론 출판의 자유와 시민의 알 권리를 묵살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이 상황에서 워싱턴 포스트는 틈새 시장을 먹는다. 유서 깊은 언론이긴 했으나 지역 신문사에 불과하던 워싱턴 포스트는 같은 밀고자로부터 펜타곤 페이퍼를 입수하고, 뉴욕 타임스가 물을 먹은 사이 그들이 보도하기로 결정한다. 이 과정에서 정보 입수에 공을 올린 건 배그디키언(밥 오덴커크 분)이며, 취재에 열을 올린 건 편집국장인 브랜들리(톰 행크스 분)다. 그리고 최종 공표 결정을 내리는 발행인은 캐서린 그레이엄(메릴 스트립 분)이다. 이들은 같은 정보원으로부터 입수한 페이퍼이므로 뉴욕 타임스에 가해진 것과 같은 법원 명령으로 사법 조치를 받을 수 있다. 최악의 경우 워싱턴 포스트는 폐간되고 캐서린은 수감된다.
캐서린은 펜타곤 페이퍼 연구자와 친우였으며 심지어 대통령과도 친분이 있었다.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 대에 세워져 남편이 일임하고 그런 남편이 자살하면서 넘겨진 워싱턴 포스트의 최고발행인이다. 그녀에게는 워싱턴 포스트 하나가 가족이자 유산이며, 그녀 앞으로 남은 유일한 재산이다. 그런데도 전화 통화를 통해 공표를 결정하는 캐서린의 표정은 가히 해방적이며, "갑시다, 가요, 가요, 가요, 가세요, 발행하세요."라는 허가의 떨어짐은 결연하다. 스필버그의 연출은 강렬한 드라마를 선보이고, 메릴 스트립의 진솔한 연기는 유약하고 수동적인 위치의 여성이 어떻게 용기를 내는지 설득한다. 이동진 평론가는 영화에 대해 "시종 뉴욕타임즈가 아니라 워싱턴포스트가 주무대인 이유. 결국 남성편집국장이 아니라 여성발행인이 주인공인 이유"라고 평한 바 있다. 최고 언론으로서 많은 독자의 지지를 담보하고 폐간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뉴욕 타임스는 보도를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커리어를 잃는 것이 아니라 명예를 얻을 것을 생각하고 야망을 좇은 편집국장 브랜들리는 보도를 망설이지 않았다. 그러나 무능하다고 평해지며, 남은 남성 가족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워싱턴 포스트를 상속받은 여성 발행인 캐서린은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필요한 자리에서 필요한 일을 했다. "이런 일을 다시는 감당 못할 것 같아요", 마지막에 가서도 후련한 얼굴로. 법원에서 나오는 캐서린의 앞에는 기자 무리가 깔리는데, 캐서린이 계단을 내려올 때 그녀의 주변에는 여성 기자들만이 줄서 존경의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영화적 허용일 테지만 가장 영화적인 순간이다.
 
 
 
9월 6일
 
도서관에서 dvd를 빌려 보았다.

Alan J. Pakula, All the President's Men(1976)

'더 포스트'의 마지막 장면은 워터게이트 도난 사건인데, 이는 1976년 영화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의 첫 장면과 동일하다. 연이은 시기를 다루는 같은 언론 영화를 제작하면서 스필버그가 경애를 담아 넣은 장면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은 워싱턴 포스트의 워터 게이트 사건 특종 보도를 영화화한 것이다.
워터게이트는 공화당의 닉슨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위원회에 침입해 도감청과 사보타주를 한 사건을 말한다. 해당 사건을 취재한 기자 밥 우드워드(로버트 레드포드)과 칼 번스타인(더스틴 호프만)은 신입 기자로서, 형편 없는 기사만 쓴답시고 해당 건의 깊은 취재를 편집국장과 선배 기자들로부터 만류받았다. 우드워드는 워터게이트 침입자들의 재판에 참석했다가 그들의 변호사 모두가 공통된 출처의 자금을 받은 데에서 취재를 시작한다. 그런데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들의 취재는 난항을 겪는다. 바로 직전에 걸었던 전화는 없는 전화가 되고, 인터뷰이들은 아무 말도 해주지 않겠다고 고개를 젓는다. 조금이라도 말이 통하는 사람들은 협박을 받고 있고, 기자인 그들 또한 감시와 도청을 당한다. 우드워드를 도와주는 이는 오로지 주차장에서 만나는 내부 정보원 deap throat(포르노 영화에서 따온 별명) 뿐인데, 그는 기자가 취재를 해오면 사실여부를 확인해줄 뿐 구체적인 정보를 불지는 않는다. 그가 유일하게 단서를 남긴 바는, "Follow the money."
결말은 시원치 않다. '더 포스트'가 보여주었듯, 신문이 팔리고 시민들의 시위에 불을 지피는 장면은 연출되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닉슨이 대통령 재임에 성공했다는 취임식이 텔레비전 방송으로 송출되고 있다. 우드워드와 번스타인은 그저 그 뒤로 가서 타이핑을 계속할 뿐이다.
그러나 이 사건이 뉴욕 타임스 1면을 이례적으로 가득 메운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닉슨 대통령은 미국 대통령 최초로 사임했고, 다음 대통령은 청렴함을 내세운 민주당의 지미 카터가 당선되었다. 흥미로운 지점은 사건 발생일이 1972년이며, 닉슨 대통령이 사임한 것은 1974년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영화가 개봉한 1976년은 굉장히 이른 시점이다. 미국의 미디어 혹은 엔터테인먼트가 이처럼 사회비판적이고 동시대적이었음을 느낄 만한 사료다.
 
 

오펜하이머, 별이 죽은 다음을 연구하는 사람
2023.08.18

놀란은 다시금 호이테마를 촬영으로, 고란손을 음악으로 기용했다. 루드비히 고란손의 음악은 영화의 가장 드라마틱하지 않은 장면들마저도 극적으로 끌어올린다. 러닝타임 내내 사운드를 감싸며 휘몰아치는 그의 음악은 다소 과하지 않나 싶을 정도면서도, 주인공이 오펜하이머임을 생각하면 말마따나 "연극적인" 인물을 표현하는 톤으로서는 미스초이스가 되지는 않는다.
진술로써 기억의 편린이 모인다. 특기인 시간과 초점의 플롯을 능수능란하게 활용했는데, 전기영화로서 취하기 유리한 것이었을 테다. 몇 가지 장면을 해체해서 교차편집하고, 조각보처럼 엮어놓았다. 영화는 원자폭탄과 윤리에 대한 다양한 담론을 다루지는 않는다. 사람 이름을 제목으로 내걸었듯 전기에 충실하면서 전적으로 오펜하이머의 심리에 의지할 뿐이다. 그런데 개인이 가진 죄책감에 모든 책임을 지워버리는 한편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서 그를 두둔한다. 당신의 발명 때문에 나의 아들들이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명령을 내린 것은 정치인"이라는 트루먼의 말. 영화는 차라리 매카시즘으로 희생당한 영웅사를 그리는 것이다. 감독은 자신을 매료시킨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에 대해 연민을 가지고 평전을 쓴다. 포스터는 '핵을 등지고 선 오펜하이머'를 위시하지만, 영화에서 보이는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을 발명해내며 빛나는 사람이나 그것을 발명해서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이라고만 라벨을 붙일 수는 없다. 그는 그저 스스로 꾸민 인생의 무대 위에 있는 사람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뉴 멕시코의 로스 알라모스에 자신이 사랑하는 물리학을 움트게 한. 그리고 '별이 죽은 다음'을 연구하는 사람답게 결말이 난다. 아인슈타인이 그러했듯 물리학자로서 수명을 다하고 죽지만 블랙홀처럼 폭탄을 터뜨린다. 결국 영화는 감독이 쓴 오펜하이머 탄원서다.
 

와중에 "음악을 들을 줄 알면 악보는 읽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얼마나 위로가 되는가. 과학에서 유식함과 배웠음은 수학을 언어로 쓸 줄 아는지의 여부다. 오펜하이머는 자수성가한 아버지를 두었고 엘리트였지만, 또한 그중에서는 열등생이었으며 게다가 수학에 밝지 못한 과학자였다. 하지만 그는 맨해탄 프로젝트의 총책임자로서 트리니티 실험을 성공시켰고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가 되었다.
 
다만 그는 마냥 가련한 인물도 아니다. 문학적인 사람이긴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그렇듯 유머러스한 구석이 있다. (영화를 보기 전 나는 오펜하이머에게 버지니아 울프 같은 구석을 보았고, 그건 가련한 얼굴과 사연 뒤에 웃기는 기질이 있음을 말한다.) 석학 시절 지도교수의 사과에 시안화칼륨을 주입하는 것만 봐도 각이 나온다. 또 스트로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분)를 미천한 구두장이라고 칭하질 않나 공개적으로 모욕한 것을 보라. 나로서는 스트로스가 더욱이 이해되는데, 자수성가한 후원자로서 2세 유대인이 면박을 주면 화가 나지 않고 배기겠는가. 아내가 육아에 지긋지긋해하자 바로 맡겨버리는 줏대는 무엇인가. 지인의 말을 빌리자면 오펜하이머의 자식들은 늘 울고 있는 모습만 비추고 "산출물"과 같이 취급된다는 것이다. 핵을 세상에 내놓았듯 자식도 세상에 내놓았다. 달리 말하자면 원자폭탄도 그의 자식이며 오펜하이머에 의해 피투성되었다. 오펜하이머도 자신 부부를 이렇게 말한다. "우린 이기적인 사람들이야."
 

놀란이 연출한 영화들이 매번 그랬듯 로맨스는 어설프다. 오펜하이머와 진 태틀록의 정사 장면은,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를 말하는 첫번째 씬이건, 청문회에서 까발려져 모욕당하는 동시에 부인 키티에게 모욕을 주는 장면이건 그렇다. 놀란의 영화에서 여성인물들은 지극히 납작하고 페티쉬적이다. 심지어 놀란 영화의 여자들은 전부 죽은 아내 역할이라는 밈이 있을 정도이므로. 그런 인물들에 그나마 숨을 불어넣어주는 것은 여배우들-마리옹 꼬띠아르(인셉션), 엘리자베스 데비키(테넷)-의 몫이었으니, 이번 영화에서도 에밀리 블런트와 플로렌스 퓨의 울분과 섬세함이 담긴 연기가 공이 크다.
또 인종통합을 지지하니 마니 하는 시대배경이므로 고증을 한다고 해도 그렇지, 이런 이유로 만들어진 백인 영화가 얼마나 많은가. 처음 라미 말렉의 출연은 모욕적인 분량이었고 후반에 이 평가가 뒤집히긴 하나 영화가 인종차별적이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다. 보다못해 던져주는 여성 과학자의 출연 또한 없는 것보단 낫지만 이 모든 출연이 불평 방지용처럼 느껴지는 바다.
 
개인적으로 씬스틸러라 느꼈던 인물은 베니 사프디가 분하는 에드워드 텔러였다. 텔러는 슈퍼라고 칭해지는 수소폭탄의 아버지다. 오펜하이머가 수소폭탄을 발명하지 않는 대가로 원자폭탄을 자제하기로 하는 평화주의를 주장하는 반면, 텔러는 군비 경쟁에 찬성하며 개발하기를 원한다. 다만 영화에서는 실존인물보다 비교적 온화하게 나오는데, 오펜하이머와의 우정 또한 각별해 보인다. 수소폭탄을 무시당한 텔러는 게으른 수학자가 되어 동료들과 한 탕 싸우고 로스 알라모스를 떠나려 한다. 오펜하이머는 그를 바로 뒤따라 나선다. 텔러는 오펜하이머가 자신을 만나주지 않을 거라며 떠나버리리라 말하지만, 오펜하이머는 기꺼이 주에 한 시간은 너에게 시간을 쏟겠노라 말한다. 누군가의 한줄평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든 것, 놀란이 "과학자들을 락스타처럼 그려놨다."
"사프디 형제" 중 한 사람이기도 한 베니 사프디의 연기는 전공자의 연기와 달리 투박하며 자연스럽다. 또 그가 가진 풍채와 외모, 목소리가 주는 아우라는 가히 시선을 끈다. 그의 연출작을 손꼽아 기다리면서도 연기를 하는 그가 더욱이 보고 싶은 이유다. 이렇게 큰 영화에서 이렇게 큰 역할로 나왔으면 연기자로서의 향후를 기대해 볼 수도 있겠다.
저명한 배우들이 총집합한 영화인지라 보는 즐거움이 컸다. 놀란은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 킬리언 머피를 시종일관 아름답게 찍어놓았다. 연기에 대해서는 특출난 감흥을 받지 못했는데, 요란스러운 사운드와 화면에 오히려 묻어가는 느낌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는 놀란의 영화 보다는 켄 로치의 영화에 어울릴 사람이다(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또 더 보이즈에서 휴이 캠벨 역이었던 잭 퀘이드의 출연도 반가웠다. 잭은 이 영화에서도 휴이(혹은 배우 자신) 같으면서도 파인만 같다. 내게 파인만은 괴짜에 웃긴 사람이라는 이미지였고, 영화에서도 똑같은 얼굴이 봉고를 치고 있었다.